I need you
날짜. 2021.10.31
작가. 레딤파 (@wonderwall_ABC)
분야. 소설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빼곡히 자란 잡초 아래 완전히 가려진 주차공간을 겨우 찾아 잠시 숨을 골랐다. 이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안을 탓이다. 그는 두 손을 모아 핸들 위에 올려놓았다. 튀어나온 손등 뼈마디에 매끈한 이마를 맞춰 대었다. 뻐근한 통증이 올라올 정도로 머리를 세게 누르자 잠시나마 정신이 맑아지는 것만 같다. 깊이 숨을 들이마셔 폐를 가득 채우고, 느릿하게 내뱉으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랗고 탐스러운 해바라기 한 다발과 그 아래 깔린 서류철이 조수석에 얌전히 놓여있다.
어린 시절의 아나킨은 해바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까만 씨앗이 가운데 옹기종기 들어찬 모습이 어렸던 소년에겐 유독 불쾌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딱히 생각이 변하지 않았지만, 꽃을 챙겨온 이유는 해바라기를 좋아하던 사람의 기일이기 때문이며, 남은 사람에게 빛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나킨은 콰이곤 진의 생전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눈을 감으면 쉽게 떠오르는 그의 모습은, 아나킨에게 가족을 선물한 그 날이다. 콰이곤은 한 손에 해바라기 다발을 들고 다른 손으로 아나킨의 작은 손바닥을 꼭 쥐었다. 그는 큰 키와 어울리지 않는 느린 걸음으로 아이와 발을 맞추어 걸었다. 아나킨은 그의 손을 잡고 불안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어렸던 소년에게 저택은 너무 커다랗고 무시무시하게 보여서, 처음 들어선 날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들을 마중 나와 있던 다른 남자의 차림새도 정확히 기억한다. 콰이곤이 들고 있는 해바라기처럼 반짝이는 노란 머리카락과 하늘처럼 파란 눈. 또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옅은 갈색 티셔츠와 검정 바지까지. 어린 아나킨은 그를 반기는 젊은 남자의 미소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반짝이는 사람은 소년의 짧은 인생에서 난생처음 본 것이었다.
“아나킨, 만나서 반가워. 난 오비완 케노비라고 해.
그의 인사에 아나킨은 저도 모르게 콰이곤의 다리 뒤로 숨어버렸다. 남자는 아이가 수줍음이 많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숨긴 소년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아나킨, 이제부터 내가 네 형이 되어줄게.”
살짝 내민 손가락 끝은 둥글고 깨끗했다. 그것이 그와 잘 어울려서, 어린 아나킨은 오비완의 손을 온종일 잡고 다녔다.
*
아나킨은 서류철과 해바라기를 머뭇머뭇 쓰다듬다가 고민 끝에 꽃다발만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때의 콰이곤처럼 해바라기를 품에 안고 저택의 현관 앞으로 향했다. 그는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추억이 많은 장소인 만큼 필연적으로 그리움이 숨어있다.
고즈넉한 숲속에 우두커니 자리한 이 고택은 지어진 세월만큼이나 쓸쓸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고독하고 우중충한 이곳도 늘 푸르고 아름답던 시절이 있었다. 오랜 시간 흐려진 기억 속에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저택을 가득 채웠던 웃음소리를 바람결 사이로 엿들었다.
그 시절은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저택을 둘러싼 장미정원과 뒷산 가득 녹음이 우거져 풀 내음은 향긋하고 싱그러웠다. 어렸던 아나킨은 뙤약볕 아래를 쏘다니며 나무를 타곤 하였다. 야무진 손발로 나무를 오르면, 그 아래 서서 걱정스레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들렸다.철이 없던 아이는 오비완의 걱정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누군가가 나를 걱정하고 돌봐주는 것이 좋아서 한껏 짓궂은 미소를 짓고 더 열심히 사고를 치곤 하였다.
시야를 방해하던 땀방울을 닦아내자 아나킨이 어렸듯, 젊고 미숙한 그 시절의 오비완이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였다. 아나킨은 그를 한번 바라보고, 바로 몸을 날렸다. 아이의 돌발행동에 기겁한 오비완의 눈이 커다래지며 새된 목소리로 아나킨을 불렀다. 허겁지겁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몸을 던진 아이를 받아낸 그는 풀밭 위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품에 안긴 채로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땅을 구른 탓에 온통 풀물이 들어버린 오비완의 흰 셔츠가 왜 그리도 우습고 즐거웠는지, 아나킨은 키득거리는 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남자의 말간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햇살을 받아 따끈따끈한 오비완의 볼을 꼬집고 밀가루 반죽을 하듯 주물러대자 희미한 한숨과 함께 그가 눈을 떴다.
“아나킨….”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에 얼핏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아나킨은 그가 자신을 혼내지 않을 걸 잘 알았다. 오비완은 날 사랑하니까! 아나킨은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오비완 나 잡아봐요!”
명랑한 울림이 발길이 닫는 곳마다 바스락거렸다.
아나킨은 비탈길을 반쯤 구르듯 내려왔다. 나뭇잎투성이가 된 몸을 털어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숨바꼭질하는 강아지처럼 활짝 핀 붉은 장미 사이를 파고들어, 커다랗고 위엄있는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면 약속이라도 한 듯 때마침 마중을 나온 키가 큰 중년의 남자가 소년을 훌쩍 안아 들었다.
“아나킨, 놀이는 이제 끝이야. 저녁 먹을 시간이란다. 오비완은….”
콰이곤 진은 아나킨이 달려온 방향을 바라보다 엉망인 아이의 머리를 더욱 헝클어뜨리며 크게 웃었다.
“오비완을 또 따돌린 거구나. 자꾸 이러면 형이 너랑 안 놀아줄지도 몰라.”
그러자 아나킨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오비완은 평-생 저랑 같이 있을 건데요?”
소년의 맹랑한 자신감에 콰이곤이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고 싶으면 얼른 가서 오비완도 데려오렴!”
아나킨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와 함께 그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오비완의 이름을 고함치며 다시 숲으로 내달렸다.
*
순수하고 걱정 없던 시절의 기억이 어른이 된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추억을 뒤로하고 품에 안은 해바라기 다발을 추켰다. 지금의 저택은 그 시절의 푸른 기색 한점 찾아볼 수 없이 낡아빠진 흉가 같았다. 키가 자란 잡초만 무성하고 붉었던 장미정원은 메마른 가지만 남았다. 생기 넘치던 나날은 너무 빠르게 사라져버려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책임감으로 관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단….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 죄책감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아나킨은 완전히 달라져 버린 저택의 입구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예상대로 답이 없었다. 쨍쨍한 햇빛만이 아나킨의 머리꼭지를 데우고 있을 뿐, 침묵에 쌓인 현관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나킨은 몇 번 더 두드려 볼까 고민하다가 더 빠른 길을 택했다. 바지 주머니를 뒤져 전화를 걸었다. 옛날 집인 터라 방음이 썩 훌륭하지 않았고, 주위가 워낙 조용하여 집안에서 들려오는 벨 소리가 우렁차게 뻗어 나왔다. 잠시 후 소리가 뚝 끊어지자 아나킨은 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녹슨 문의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주인이 문을 열었다.
“....아나킨, 열쇠는 어디에다 두고.”
“....얼굴 봐서 좋네요. 네 저도 반가워요. 오비완.”
오비완 케노비는 아나킨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멋쩍은 듯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눈가를 누르고 몸을 물려 아나킨이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얼마나 오랜만이라고…. 그래, 반갑구나. 아나킨.”
인사가 끝나자마자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오비완을 부둥켜안았다.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현관 앞에서 이상한 애정표현을 하는 아나킨에게 오비완은 숨이 막혀 그의 가슴을 꾹꾹 밀어냈다.
“꽃, 꽃 망가진다…! 다 뭉개지겠어!”
오비완의 조악한 변명을 들으며 아나킨은 즐겁게 웃었다. 하지만 오비완의 입술 사이로 풍겨오는 알코올 향을 맡자마자 아나킨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추락하고 만다. 예민한 코를 오비완의 목덜미에 대고 킁킁거리다가 포옹을 풀고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비완은 그가 스스럼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다급히 뒤를 따랐다.
“아나킨, 거기 지금 엉망이야. 정리 하나도 안 돼서, 아나킨 잠깐만! 원고 때문에…….”
더듬거리며 늘어놓는 핑계는 아나킨의 행동을 멈추게 하긴 역부족이다. 그는 능숙한 형사답게 오비완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않으며 알코올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햇빛 한점 들지 않도록 꼼꼼하게 커튼을 쳐둔 응접실로 들어선 아나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뒤따라온 오비완이 마른 입술을 깨물며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이의 눈치를 보았다. 이러지 말라는 듯 뻗은 손을 움츠리는 오비완이 안쓰러웠으나 무시하는 것이 옳았다. 아나킨은 어두침침한 집안을 밝히기 위해 미련 없이 커튼을 걷었다. 눈부시게 펼쳐진 광명이 응접실의 어둠을 순식간에 빼앗는다. 갑자기 밝아진 흰빛 탓에 눈이 부셔 미간을 찡그리고 몸을 돌렸다. 환해진 거실은 예상대로 엉망진창이다.
역시나…….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술병들이었다. 아나킨이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 오비완이 누워있었던 거로 추정되는 소파 아래엔, 떨어진 담요와 온갖 종류의 유리병, 맥주캔이 즐비해 있다. 그나마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진 노트북 한 대가 켜져 있는 것을 보아 원고를 쓰고 있었단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비록 글을 얼마나 썼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나킨은 발치에 놓인 빈 병 하나를 주워들었다.
“언제부터 마셨어요?”
오비완은 늘 단정하고 여유로운 사람이었지만 이 시기가 되면 자주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어리석은 변명을 위해 말을 고르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건 정말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오비완은 기어코 그답지 않은 말을 하고야 만다.
“....오늘 아침.”
아나킨이 경고하듯 눈짓했다.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믿지 않을 소리였다. 아나킨은 한층 더 굳은 얼굴로 술병이 가득한 바닥을 한번 보았고, 다시 오비완을 빤히 쳐다봤다. 그 기세에 눌린 오비완은 그늘진 눈가를 슬그머니 내리며 다시 말했다.
“…진짜 얼마 안 됐다. 어제, 어젯밤부터….”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면서 꿋꿋이 회피하려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연유가 무엇이든 아나킨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팔짱을 끼고 오비완을 나지막이 부르자 결국 그는 아나킨의 날 선 추궁을 견디지 못하고 자수하고 말았다.
“그래, 이번 주 내내 마셨다. 어차피 너도 눈치챘으면서 굳이 묻는 건 무슨 심보야.”
심보는 무슨 심보란 말인가. 난 오직 당신 걱정뿐 인 거 뻔히 알면서, 자꾸 이런 식으로 당신을 방치하니까 내가…. 아나킨은 치밀어오르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술기운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오비완의 안색을 살폈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피하는 그에게 대뜸 해바라기 다발을 내밀었다. 오비완은 얼떨결에 받아든 꽃을 품에 안고 또다시 눈치를 보았다.
“그건 응접실에 두는 게 낫겠어요. 그럼 적어도 당신이 광합성은 할 테니까.”
“사람이 광합성은 무슨…. 누가 콰이곤한테 배운 거 아니랄까 봐 말하는 것도 똑같구나.”
그 소리를 듣자 아나킨은 실룩이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오비완 케노비 역시 아나킨의 실없는 미소에 피식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시절과 같았다. 상실의 슬픔은 그야말로 어둠이었으나 동시에 남은 이들은 서로를 보듬으려 빛을 쫓았다. 콰이곤 진이 좋아했던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쫓아 머리를 내밀고 숨을 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너무 밝아서, 오비완은 그늘 없이 살기에 벅찼다. 온전히 빛을 받을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밝은 빛 아래서, 그를 끌어내고자 손을 뻗는 아이의 손을 무심하게 뿌리치고 어둠 속으로 틀어박혔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지, 오비완은 때때로 둔해진 시간 감각을 탓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멈추지 않는 아이가 있다.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강제로 빛을 쬐게 만드는 아나킨이 오비완은 가끔 버거웠다. 동생 같던 아이가 당신을 지켜주겠노라 뻗어왔던 손은 너무나 따뜻하고 믿음직해서, 오비완은 아나킨의 사랑에 겁을 먹었다.
오비완은 아나킨이 제게 고백하던 날을 떠올리면 괴로웠다. 아나킨은 콰이곤의 죽음 이후 술독에 빠져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그를 붙들고, 엉망이고 추한 오비완을 억지로 일으켰다. 오비완이 지켜주지 못하는 사이 어른이 돼버린 아이가, 눈물을 참느라 온통 붉어진 눈가로 흐느끼며 말했다.
“사랑해요. 오비완, 알잖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오비완은 알코올의 힘을 빌려 제멋대로 중얼거렸다. 원하는 게 뭐야 날 내버려 둬 제발. 어떻게 하면 날 두고 갈 거야? 너도 날 버려야지. 나도 나를 버렸는데. 왜 계속 옆에 있으려는 거야.
횡설수설하는 오비완의 어깨를 아나킨이 강하게 붙들었다. 흐느적대는 몸을 바로 세워 시선을 맞춘다. 한가득 고인 눈물을 떨어뜨린 아나킨의 얼굴은 오비완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이 고백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른 입안이 무척 씁쓸해서 오비완은 그만큼 모진 말을 뱉어낼 준비를 했다.
“사랑한다고? 그래, 모를 수가 없지. 그게 아니라면 네가 내 곁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 난….”
오비완은 그 순간 아나킨의 상처받은 눈동자를 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어떤 것이든 반박하고자 하는 그 짧은 찰나, 오비완은 거칠게 아나킨을 밀어냈다. 넌 내 동생이야 같은 소리는 먹히지 않을 테였고 오비완도 그리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슴 깊이 묻어둔 진실을 말했다.
“....네 사랑은 너무 눈부셔 아나킨.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 거 알잖아. 내가 네게서 뺏었고, 나는 도망쳤지. 나는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그냥……. 이런 건 다 잊어버려.”
두 사람 중 누구도 그날의 거절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크는 계속되었다. 아나킨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오비완도 그가 멈추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저 언젠가 양심도 없이 그의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오비완은 가장 두려웠다.
*
아나킨이 커다란 쓰레기 봉지에 술병을 담을 동안 오비완은 해바라기의 줄기를 정돈해서 화병에 꽂았다. 아까 전의 소동으로 살짝 망가지긴 했지만, 활짝 핀 꽃들은 여전히 싱그러웠다. 물기가 스며 풀 향이 물씬 풍기는 꽃잎을 쓰다듬으며 오비완은 반사적으로 그 사람을 떠올리고 말았다. 병을 주워 담을 때마다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음조차 기억의 흐름을 멈추진 못했다. 미리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오비완 케노비는 약보다 술을 선택한 자신이 이제야 원망스러워졌다.
그는 주정뱅이처럼 떨리는 손을 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떨림을 시작으로 이어진 호흡곤란과 까맣게 물드는 시야, 허물어지는 다리까지. 오비완은 이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그는 쓰러지기 직전 테이블을 붙잡아 꼴사납게 넘어지는 걸 겨우 면했다. 덜컥 막힌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목을 더듬자 윙윙거리는 귓가에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나킨일 게 분명해서, 오비완은 그대로 그에게 몸을 넘겼다. 단단한 팔이 등을 감싸오자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수를 세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는 뜨겁고, 차가우며 어지럽다. 하나, 둘, 셋, 넷…. 괜찮아, 여긴 안전해. 나는 여기 있어…. 괜찮아….
오비완은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폭음을 따라가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그날의 악몽으로 돌아가는 건 아직도 견디기 힘들어서, 그는 최대한 마음의 거리를 두기 위해 매일같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유약한 정신은 이 시기만 다가오면 언제나 그 노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조롱하듯 그를 마구 흔들어버린다. 난 그날을 보고 싶지 않아. 강렬한 바람만큼 그의 마음은 단단하지 못해서, 오비완은 속절없이 그 시간을 헤매고 말았다. 허우적대는 손을 누군가 붙잡았다. 아나킨, 아나킨 나 좀 꺼내줘. 나는 다시는…….
*
오비완 케노비는 가차 없이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에 머리를 싸매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오비완 일어나야지. 이러다 늦겠구나.”
콰이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귀를 간지럽히는 구석이 있었다. 오비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졸린 눈을 겨우 뜨는 데 성공했다. 아침에 유독 약한 그는 방의 커다란 창을 암막 커튼으로 빈틈없이 가려두었는데, 콰이곤은 오비완을 어둡게 두려 하지 않았다. 그는 빛을 피하는 나쁜 버릇을 가진 아들의 방에 해바라기를 장식해두어 의도적으로 빛을 들게 하였다.
콰이곤 진은 꽃을 사랑했다. 세 식구가 사는 이 저택의 정원은 붉고 흰 장미가 송이송이 피어있었고,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온갖 종류의 꽃들이 화병마다 예쁘게 꽂혀있었다. 밝고 어여쁜 것을 좋아하는 성격처럼, 콰이곤은 그중 해바라기를 가장 사랑했다. 그래서 그가 아끼는 아이들의 방에 그것을 두었다. 꽃을 키우기 위해선 햇빛과 물, 사랑이 필요하듯 아이들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이젠 아이라기엔 너무 커버렸지만, 콰이곤의 아침 일과는 오비완과 아나킨의 방 커튼을 걷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비완은 훌쩍 큰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의 유난스러움에 잠을 깨야만 했다.
밝은 햇살은 괴로웠으나 곧 달려올 녀석이 뻔했기에 찌뿌둥한 몸을 비틀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젠 그보다 큼직해진 녀석이 오비완에게 달려들었다.
“오비완, 빨리빨리 일어나야지!”
변성기가 지난 아이의 목소리는 많이 굵어져 간혹 소년이었던 아나킨이 그립게 만들었다. 오비완이 쏟아진 무게에 끙끙대자 콰이곤이 그들을 향해 짝- 손뼉을 쳤다.
“아나킨은 형 그만 괴롭히고, 오비완 넌 자료 보러 나간다고 했잖니. 태워다 줄 테니까 어서 준비하거라.”
오비완은 콰이곤이 달래듯 말할 때마다 어린애가 된 것만 기분에 휩싸였다. 스물을 넘은 지가 대체 언제인데…. 부끄러운 얼굴을 숨기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가족이었지만 혈연은 아니었다. 오비완은 콰이곤이 입양한 아이였으며(오비완을 배려하여 케노비 성을 그대로 쓰게 해주고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게 허락했다) 아나킨은 콰이곤의 대자였다. 아나킨의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고 일가친척이 없던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유언에 따라 콰이곤의 손을 잡고 이 고리타분한 저택에 들어왔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작은 낙원은 완벽했고 따뜻했으며 사랑스러웠다. 너무 깨끗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구슬 같았다. 하지만 행복하고 아름다운 낙원은 그만큼 연약해서, 쉽게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그들은 전혀 몰랐을 뿐이다.
오비완은 가방에 노트북을 챙기고 콰이곤의 옆자리에 탔다. 뒷좌석의 아나킨이 학교에 내리기 직전까지 얼마나 떠들어댔는지 오비완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지겨워하는 오비완을 눈치챈 아나킨은 그새 심통이 났던 모양이다. 그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돌연 오비완의 귀를 꽉 깨물고 도망치듯 차에서 뛰어내렸다. 오비완은 졸지에 다 큰 동생에게 귀를 깨물린 게 황당했고, 콰이곤은 크게 웃으며 오비완을 놀리는데 한몫하였다.
오비완은 아나킨의 버릇없음을 한탄했다. 콰이곤이 너무 풀어줘서 그런 게 아니냐 항변하고, 애가 무슨 개도 아니고, 아나킨에게 깨물리지 않은 곳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콰이곤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주다 갑자기 도로변에 주차했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는데요?”
오비완의 물음에 콰이곤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네 기분을 풀어줄 만한 걸 봤다며 차에서 내려 어느새 도로를 건너가 버리는게 아닌가. 그러자 오비완은 자신이 너무 짜증을 낸 것만 같아서 되려 낯뜨거워지고 말았다. 아나킨이 졸업반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랑 열 살은 차이가 나는데…. 그래, 장난을 많이 칠 시기긴 하지. 그러자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애가 입질 좀 했다고 십 대 마냥 예민하게 반응하다니, 아나킨과 같이 있으면 함께 유치해지는 자신이 한심해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적해진 오비완을 깨운 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는 고개를 돌렸고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창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일까,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가 알 수 있는 건 얼핏 보이는 남자의 목덜미가 새카만 문신으로 뒤덮여있다는 것뿐이다. 남자의 외모를 그 이상 자세히 볼 수 없어서 오비완은 그가 도움이라도 청하려는 줄만 알았다.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콰이곤에게 오랫동안 교육받은 가치였고, 그것은 오비완을 너무 쉽게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는 동안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총구가 코앞에 들이밀어 진 순간에도 오비완은 남자의 문신만큼 새카만 총신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는 생각만 하였다.
너무나 직접적인 위협은 극도로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굳어버린 오비완은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총구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단 하나의 의문은 그의 총명한 이성에게 도망치라 경고하지 못했고, 하얗게 질려가는 시야는 초점을 잡지 못해 흐릿해졌다. 남자가 쏟아내는 무수한 말은 단 한마디도 이해되지 못한 채 흘러만 갔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한 소름이 식은땀과 함께 타고 내린다. 그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불렀다.
“오비완!”
무척 크고 절박한 목소리가 오비완을 부른다. 어지러운 눈앞이 가려지며 끔찍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오비완은 그 이후로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누군가 그의 뇌를 통째로 들어내기라도 한 듯 흔적으로만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이다. 그가 기억하는 거라곤 귀가 터질 것처럼 시끄러운 폭발과 동시에,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등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내려간 창문 너머로 오비완의 창백한 얼굴에 튄 핏물이 물감처럼 번졌다. 그것이 뜨거웠는지, 차가웠는지 정확한 온도를 느낄 수 없었다. 그 감촉은 꼭 여름날의 바닷물처럼 끈적여서, 오비완은 코끝을 떠나지 않는 물비린내가 지독히도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 냄새가 죽음이란 사실을 깨달은 건 멍멍한 귀의 이명이 잦아들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서다. 그를 지켰던 등이 죽었다. 콰이곤 진, 그의 아버지가 너무나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아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잠시 차를 나섰던 그는, 아들을 지키고 사라졌다. 아니, 멍청한 아들 때문에 죽은 것이다. 오비완은 새빨간 핏물에 질식하여 눈을 감았다.
*
“미안해….”
꽃꽂이하다 갑자기 의식을 잃더니, 정신을 차리고 나서 한다는 말이 사죄라니….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소파에 눕혀둔 오비완의 초점 없는 눈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콰이곤이 죽은 날에도 이렇게 말했다. 총격이란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뛰어온 아나킨을 본 순간 그는 여전히 핏자국이 남은 얼굴로 사과를 했다.
“미안해 아나킨, 내가 미안해.”
아나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이 뭐가 미안해. 왜 형 탓을 해? 그 새끼가 콰이곤을 죽인 걸 왜 형이 사과하냐고. 더는 어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니었던 아나킨은 그저 화가 났다. 환자복을 입은 오비완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뭐가 미안한지 말을 하라고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비완까지 왜 이러느냐고, 정신을 차리라고…. 하지만 아나킨은 쏟아내지 않았다. 흘러넘칠 듯한 감정을 꾹 참고 울렁이는 목울대를 진정시켰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는 오비완을 안아주었다. 굳은 피를 미처 닦지도 못하고 손만 떨고 있는 오비완을 천천히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미안하면, 내 곁에 있어 줘. 오비완. 날 혼자 두지 마….”
오비완 케노비는 대답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아나킨의 끊임없는 속삭임을 들으며 질식하던 숨을 되돌려 놓았을 뿐이다.
아나킨은 소파에 누워 숙취와 공황으로 헤매는 오비완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냉기 덕에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는지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이 천천히 아나킨을 향했다.
“미안하면, 술은 그만 마셔요. 이러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혼자 둬? 나 그냥 다시 집에 들어올까.”
“...그럼 넌 밥 먹듯이 지각하겠지…. 경찰이란 녀석이 매일같이 지각하는 건 아주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농담까지 할 정도로 오비완의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 지친 기색은 여전했으나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가 기운을 차렸음을 보여준다.
“바람 쐬러 나갈래요? 어차피 냉장고도 비었을 게 뻔한데 나 굶길 건 아니죠? 운전은 제가 할게요.”
아나킨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오비완이 한번 틀어박히면 집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을 안다. 특히 원고 지필을 시작하거나, 콰이곤의 기일이 있는 달은 집에만 틀어박혀 빛 한점 들지 않게 해두고 자신을 가둬둔다는 걸 무척 잘 알아서, 이렇게라도 끌어내고자 하였다. 오비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대신 물수건을 들고 이리저리 손장난을 치며 뜸을 들였다. 제안을 회피하는 행동이 어리숙해서 아나킨은 비집고 나오려는 실소를 참아냈다. 오비완 케노비는 고리타분하고 꽤 고상한 사람이었지만 간혹 엉망인 속을 건드린다 싶으면 이렇게 어린애처럼 딴청을 피우곤 했다. 그건 몇 년 동안 여러 번 반복된 익숙한 상황이기에 인내하며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오비완의 눈앞에 휘휘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그러자 눈만 굴리던 오비완이 결국 그의 손을 맞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야.”
“물론이죠. 저도 편히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요. 차에서 도넛만 먹다 보면 혀가 얼얼하다니까요? 몸 숙이고 꾸역꾸역 씹어먹는 건 진짜 최악이야. 오비완은 나한테 단 거 많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또 일하다 보면 안 먹을 수가 없고….”
오비완을 일으켜 옷을 챙겨 입히는 내내 아나킨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원래도 말이 많은 아이였지만 해가 갈수록 입이 더 사는 것 같았다. 사실 작가는 자신이 아니라 아나킨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나킨이 있어서 숨 쉴 만한 것도 사실이다. 그가 올 때만 빛이 들고, 그가 말할 때만 숨이 쉬어진다. 평소의 그는 몇 년간 완전히 세상과 등지고 어둠 속에서 살았다. 빛을 보기엔 너무 죄스러워서, 오비완 케노비는 그날 이후 완전히….
“나가야죠. 오비완.”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오비완의 손을 아나킨이 덥석 잡았다. 그는 언제나 이 한 발자국이 어려웠다. 몇 분이고 문 앞을 서성이다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운전대를 잡으면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면허증은 어딘가에 던져두고 자전거를 구매했다. 아무리 집에서만 지낸다 해도 직업이 있는 사람인 이상 한두 번은 일을 보러 나가야만 했기에 오비완은 그때마다 페달을 밟아 먼 시내까지 달렸다. 한번은 보다 못한 아나킨이 차라리 택시를 부르라고 타박했으나 당시의 오비완은 차에 타는 것 자체가 몹시 껄끄러웠고, 억지로 타려고 노력했을 때 그 자리에서 과호흡이 와서 그만 졸도할 뻔하였다. 아나킨이 재빨리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머리를 박아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젠 나름대로 극복을 하긴 했다. 앞 좌석만 아니면 얌전히 차를 타고 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을 하였다.
오비완은 아나킨이 데려가는 데로 얌전히 따라가 뒷좌석에 앉았다. 여름날의 햇빛이 차 안을 뜨겁게 달궈서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부터 후덥지근한 열기가 확 몰려들었다.
아나킨은 에어컨을 트는 대신 창문을 열고 달렸다. 바람을 가르며 속도를 내자 오비완의 머리가 잔뜩 흐트러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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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킨은 운전하는 내내 옆자리에 놓인 서류철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백미러로 오비완을 살피자 그는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끼고 있다. 서류와 오비완을 번갈아 흘깃대자 불편한 마음이 울렁거린다. 이걸 지금 알려주어도 되는 걸까. 하필 그의 기일에 들어온 소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집에 오는 동안 고민했지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힘없이 무너지던 오비완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두려웠다.
“....저녁 메뉴는 뭐로 할까요?”
그는 결국 가벼운 물음을 던졌다. 오비완은 눈을 뜨지도 않고 대답했다.
“매번 먹는 거 있잖니. 콰이곤이 그걸 좋아했으니까…. 너도 좋아하고….”
“그럼 덱스네로 가서 포장할까요? 아니면 만들어도 되고요.”
그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 오비완이 눈을 떴다. 자못 심각하게 구겨지는 미간이 백미러로 잘 보여서 아나킨이 눈썹을 으쓱하자 눈이 마주쳤다.
“부엌 상태가 좀…. 말이 아니라…. 그냥 사서 가는 게 낫겠다. 청소는 내일 하고, 일단 장을 보고 나서 포장하는 게 나을 거 같구나.”
심각한 표정과 달리 내용은 매우 사소하여 아나킨이 작게 키득거렸다.
“정말 오비완, 나 다시 이사할까요? 이러다 당신 굶어 죽는 거 아닌지 몰라.”
아나킨의 짓궂은 말에 오비완은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았다. 창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어 인상을 찌푸렸다. 한마디만 더해보라는 듯 짜증스럽게 올라간 눈썹이 그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아나킨은 이런 순간이 필요했다. 오비완에게 마음을 고백한 후 더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 못내 속상했고 저러다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비명횡사라도 할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이런 일상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비완도, 나도 평온한 이런 시간을 영원히 움켜쥐고 놓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나킨은 종종 차라리 고백하지 말 걸 그랬나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오비완이 나를 그 시절의 꼬마 동생처럼 대해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아나킨은 그를 형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그보다 더 긴밀하고 밀접한 방식으로, 아나킨은 오비완을 원했다. 어릴 적엔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그를 깨물기나 하는 유치한 행동을 했지만, 어른이 되어 감정을 확신하고 나선 더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숨기기에 급급했으니까. 이러다 당신이 내게서 영원히 도망칠까 무서워서, 아나킨은 타오르는 마음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더 숨길 수가 없었다. 덮고 덮어도, 오히려 불씨가 옮겨붙어 스스로가 죄다 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비완 역시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진탕 취해 널브러져 있는 그와 시선을 맞추자 그의 눈 속에 나와 같은 열기를 보았다. 아, 당신은 전부 알고 있구나. 아나킨은 참지 못하고 타오르는 마음의 불을 토해냈다. 물론 오비완이 손수 그것을 덮어버렸지만, 아나킨은 후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 떠나지 않을 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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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오랜만에 그들은 사람다운 일상을 즐겼다. 쇼핑카트를 끌고 생필품과 먹거리를 고르며 잡담을 했다.
“이건 어때요?”
“껍질 벗기는 거 귀찮다.”
“내가 와서 벗겨주면 되죠.”
“매일 오려고?”
“우리 집인데 뭐 어때요? 이사 나갔다고 이제 아주 외부인 취급이에요?”
“내가 언제 그런….”
“아, 오비완 이것도 필요하겠다.”
“그건 또 왜…. 나 그런 거 귀찮아.”
“내가 해준다니까요? 아, 그건 안 돼요. 술은 전부 안 돼.”
“이젠 한 모금도 못 마시게 하려고?”
“술은 앞으로 나 있을 때만.”
“그럼 매일 마시겠구나. 앞으로 매일 오겠다고 했으니까.”
“....진짜 한마디도 안 지네요.”
긴 대화 끝에 아나킨은 일부러 토라진 척 연기를 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자 오비완이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 세우곤 얼굴을 살폈다. 마치 어린 동생의 마음이 다치진 않았는지 아이의 표정을 유심히 확인한다.
“미안해, 장난을 좀 친 거야.”
오비완의 이런 다정함은 늘 아나킨을 뭉클하게 만든다.
“저 화 안 났어요. 오비완.”
어깨에 올라온 손을 큰 손으로 덮으며 토닥이자 오비완의 눈매가 살짝 풀렸다. 나도 알아 아나킨.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아나킨이 마주 웃었다.
덱스의 식당에 들러 스테이크와 으깬 감자, 밀크셰이크와 감자튀김, 치킨텐더 샐러드까지 포장하자 아나킨의 양팔은 종이봉투로 가득해졌다. 오비완은 그렇게까지 많이 살 필요가 있느냐 타박했지만, 아나킨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이거 전부 다 오비완이 먹을 건데요? 며칠 굶은 거 다 알아요. 볼 홀쭉해진 것 좀 봐. 술만 마시다가 위에 구멍 나서 실려 가기 싫으면 몸 좀 챙기라고요.”
결국, 입을 다문 오비완이 포기한 듯 두 손을 들었다. 너 알아서 하라며 눈을 굴린다. 아나킨은 이러다 오비완을 놀려먹는 것에 너무 재미를 붙일까 봐 걱정됐지만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어느샌가 해가 지고 있었다. 아직 따뜻한 음식들을 식탁에 내려놓으려던 아나킨이 멈칫하였다. 식탁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여 도저히 무언가를 먹을 상태가 아니었다. 아나킨은 가만히 오비완을 흘겨보았다. 그는 민망해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혼자 살면 다 그런 거다 같은 뻔뻔함을 더하기까지 했다. 그는 아나킨이 잔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쏜살같이 식탁을 정리하고 봉투를 뺏어 음식을 올려두었다. 나이 먹더니 잔머리만 늘었어요! 볼멘소리를 무시하며 오비완은 꿋꿋이 식탁을 차렸다.
나란히 자리에 앉은 그들은 식탁의 가운데에 콰이곤의 사진을 올려두었다. 그의 기일을 거창하게 챙기진 않았지만, 저녁 식사를 하며 그의 사진을 보고 짧은 기도를 올리는 게 그들의 의식이었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잔에 물을 따라주고 자신의 잔엔 그가 먹다 남은 와인을 찾아 조금 따랐다. 콰이곤의 사진을 향해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부딪친다. 유리잔의 투명한 울림이 그리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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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아나킨은 아직도 치열하게 고민 중이었다. 차에서 내릴 때 미리 챙겨온 서류를 오비완에게 보여줄지, 아니면 계속 모르게 둘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아나킨의 고민은 밀크셰이크의 빨대를 씹고 샐러드를 콕콕 짓이기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아나킨의 버릇없는 포크 질을 참다못한 오비완이 결국 식기를 내려놓으며 그를 불렀다.
“아나킨,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렴.”
단호한 말투에 아나킨이 흠칫 놀랐다. 당장 오늘도 공황이 왔던 오비완인데 쓸데없이 고통만 더하는 것이 될까 두렵다. 하지만 오비완은 알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숨겨둔 서류철을 오비완에게 건넸다.
“....이걸 보여주는 게 맞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자격이 있으니까. 당신만큼 이걸 알아야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오비완은 그의 말에 어떤 직감을 느꼈다. 예견에 가까운 본능이었다. 그것은 경고했다. 정말 알고 싶은 거야? 마음속의 겁쟁이가 속삭였다. 오비완은 서류철을 떨리는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알고 싶어.
침묵이었다. 아나킨은 길지 않은 서류 몇 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오비완을 지켜보며 초조해졌다. 그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괜한 짓이었던가, 후회가 치미는 순간 오비완이 고개를 들었다.
긴 한숨이 쏟아져나왔다. 그는 긴장한 듯 주먹을 쥐었다 펴며 이마를 매만지고, 물을 들이켰다. 단번에 비운 물잔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식탁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잔이 떨어지기 직전 아나킨이 붙잡아 바로 세웠다. 오비완의 상태를 살피며 시선을 낮추자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축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죽었다고 그 사람이….”
“....네, 교도소에서 시비가 붙어서…”
“....내 탓일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나킨은 곧장 그게 무슨 소리냐 되물었다. 대체 무슨 맥락으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콰이곤을 죽인 범인이 교도소에서 싸움에 휘말려 죽은 건데, 그게 왜 오비완의 탓이란 말인가. 아나킨은 오비완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게 왜 오비완 탓인데.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아나킨, 나는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야. 나는 그가 죽길 바랐거든. 매일같이 빌었어. 그 인간을 데려가고 콰이곤을 돌려달라고. 그런데 보렴. 뭐가 달라졌니? 벌을 받고 있던 사람이 죽은 거야. 그리고 죗값을 치르지 않은 나는…. 그냥 겁쟁이고.”
아나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자기혐오는 몹시 가혹해서 하염없이 추락하려고만 든다. 아니야.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
“아나킨, 아나킨…. 나를 봐, 난 여기 숨은 비겁자야. 하지만 너는 달랐지. 너는 콰이곤을 닮았어. 나보다 훨씬 어렸고, 아이였던 너는 어른이 돼서 경찰이 됐잖아. 그리고 네 손으로 그자를 잡았지. 난 똑똑히 기억해. 여기 숨어서 말라가던 나를 네가 살려줬으니까. 넌 네가 잡은 그 사람을 직접 법정에 세웠지…. 약이 없으면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아나킨 네가 일으켰어. 그 인간이 괴물이 아니라 한낱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준 거야. 나는 콰이곤도, 너도, 하다못해 그런 별것 아닌 인간도 혼자서는 마주 볼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죗값 하나 치르지 않고 있는 나만 구원받으면 안 되는 거잖아. 이렇게 안도하는 내가 너무 끔찍해서….”
오비완의 등이 굽어지며 무너졌다. 터진 눈물은 아나킨의 손등을 온통 적시며 뜨겁게 흘러내린다.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당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가 믿지 않을 걸 잘 알았지만 그건 진실이었다. 오비완 케노비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저 나쁜 시간과, 나쁜 장소에 있었던 것뿐이다. 우연이란 은밀하고 지독해서 때론 최악의 운명을 만들곤 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두 번이나 고아로 만든 것이 그 운명이란 놈이다. 그는 사고로 친부모님을 잃었고, 대부를 잃었다. 그건 오비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에겐 서로가 남아있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당신을 꺼내줄 거야. 그러니까 날 믿어줘요.
“…아나킨, 이제 찾아오지 말아라.”
나지막이 흐느끼던 오비완은 돌연 믿기지 않는 말을 하였다. 아나킨은 반사적으로 힘을 주어 손을 잡았다.
“그게 무슨….”
“이제, 찾아오지 마. 아나킨, 너는 나랑 달라. 너는, 훨씬 훌륭한 사람이야. 나 같은 거 때문에 발목 잡히면 안 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아나킨은 도리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언제나 말로 설득하는 건 자신이 없었다. 말을 하는 건 오비완의 몫이었고 아나킨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 대신 오비완의 젖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물기로 흐려진 청회색 눈의 반짝임을 찾아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고생으로 까슬해진 입술은 저항 없이 아나킨을 받아들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파르르 떨리는 진동이 간지럽다.
한참 동안 그렇게 오비완을 어루만졌다. 눈물과 비탄에 잠긴, 빛을 피해 숨은 그를 찾으러 아나킨은 오래도록 그를 헤맸다. 입을 맞춘 것처럼, 물러서는 순간도 차분히 멀어졌다. 눈물로 흥건한 두 눈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상당히 당혹스러워 보였으나 그는 아나킨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얼어버린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아나킨은 벌어진 오비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오비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거 알잖아.”
아나킨은 사람을 설득하는 유려한 언변 같은 걸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온종일 실없이 떠들어대는 것쯤은 우스웠지만, 입으로 누군가를 감동하게 하고 교화시키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에겐 진심이 있었다. 시간과 세월 속에 감춰둔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었고, 그것을 아끼고 소중히 대하며 한 번 싹튼 마음을 지켜낼 수 있는 인내가 있다.
“얼마든지 도망쳐도 괜찮아요. 내가 기다릴게, 당신이 더는 무섭지 않을 때까지 내가 곁에 있을게요.”
어쩌면 오비완 케노비는 어렴풋이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 지금이란 것을. 그는 겁이 많고 부도덕한 도피자였다. 그리고 이 불행한 도피를 끝내고 싶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찬란함에 기대서라도 지긋지긋한 두려움을 벗어나길 원한다. 계속해서 말해왔듯 오비완은 겁쟁이였으니까.
그는 아나킨이 필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