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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0.31
작가. 푸링 (@umchuchis)
분야. 소설
보내는 사람: 오비완 케노비
받는 사람: 아나킨 스카이워커
제목: 안녕, 아나킨.
메시지: 잘 지내니? 난 잘 지낸단다.
보통 편지는 (이건 이메일이긴 하다만) 이렇게 시작하지. 내가 언제나 강조했듯 글은 지켜야할 형식을 지켜야 생기는 힘이 있단다. 그래서 첫 시작은 형식을 지켰다.
그럼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네게 보내는 문장을 타이핑 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이겨냈기 때문이다. 네가 그립거나 보고 싶어서는 아니야. 패자는 말이 없다지만, 나는 동시에 승자이기에 한 마디가 하고 싶구나.
그 이야기를 하려면 정말 불필요한 것 같은 어느 날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야 한다. 평범한 날이기 때문에 불필요할 수도 있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
왼손이 마비된 채 깨어났다. 오비완은 괜찮았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었던 까닭. 여전히 기분은 좋지 못하다만. 그는 왼손을 계속해서 주먹 쥐었다 펼치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시간을 떼웠다. 시간은 잘도 타들어갈 텐데 그 사실이 잘 와닿지는 않는 순간, 이렇게나 멍청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순간도 없으리라 자신한다. 불필요한 자괴감을 응어리가 된다. 타들어가는 시간의 유황 냄새를 흐릿하게 맡은 것만 같을 때였다.
그때 오비완의 마비된 손이 단숨에 마비에서 풀려났다. 역설적이게도 무엇인가에 꽉, 옴쌀달싹 못하게 붙잡히자마자.
아나킨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도 허공을 떠도는 오비완의 손을 어떻게 알고 찾아내 꽉 잡아쥔 것일까. 오비완은 이름을 불러 그를 깨울까 잠깐 고민하면서도 결국 깨우지 않고 그가 하는 일련의 행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붙들 듯 잡아쥐더니 이네 손깍지를 낀다.
“일어났니, 아나킨.”
“아아, 어떻게 아셨대요.”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갸르릉 거리는 목소리가 오비완은 어쩐지 조금은 얄미웠다. 얄밉다는 마음은 자신을 잡고 늘어지는 손을 떨쳐내려는 유치함으로 쉽게 바뀌었다. 아침의 나른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신중한 오비완이 하나 (혹은 또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아나킨은 그 누구보다 끈질긴 애송이라는 사실이었다. 가볍게 털어내면 떨져나가리라 여긴 손길은 빠르게 움직이더니 손가락을 얽고 얽어 어린아이가 떼쓰듯 끈질겼다. 어린아이 같다고만, 오비완은 생각했다. 이런 적이 몇 번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아나킨!, 이라고 오비완은 븐멍 소리 쳤을 상황을 빗겨 나갔다. 정말로 오비완은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고, 덕분에 얘견하지 못한 상황이 그를 덥쳤다. 입술이 급하게 겹쳐지고 인강의 살결이 서로 부닥치고 어느덧 뒤섞였다. 오비완이 잠결에라도 상상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와 이런 일을 아주 오래전 어느 날에라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니킨보다 먼저 상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나킨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흰 가운 사이로 파고 든다. 가운의 주인인 오비완보다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전율이란 쉬운 단어가 누군가의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고 그보다 다급하게 그 전율을 가져다준 손을 떨쳐냈다. 모든 일은 오로지 ‘기분’ 탓에 일어났다. 전율을 안긴 아나킨의 손길은 곧장 끔찍한 경험을 상기하는 장치로 전락했다. 적어도 오비완은 그렇게 느꼈고, 따라서 기분이 끔찍이도 안 좋아졌다.
“오비완?”
아나킨이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제 연인이자 선생인 오비완을 불렀다. 그러나 그 부름은 너무나 뻔했기 때문에 아무런 이벤트를 발생시키지 못했다. 오비완은 드디어 자신의 가운 사이로 은밀히 파고든 손길을 완전히 뿌리치며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쿵쾅, 으레 오비완의 심장이 내놓았어야 할 음성어가 심장이라는 로맨틱한 부위에서가 아닌 발바닥, 정확히는 발뒤꿈치라는 짜증스러운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게 되었다.
“교수님……!”
아나킨이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켰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 아침을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주 조금 어긋난 채 말이다.
아나킨은 심통난 오비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아주 간단하면서도 귀찮은 일을 선택했다. 우중충한 푸른 기운을 풀풀 풍기는 인간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 바로 그 ‘선택’이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아나킨이 사과했다. 사실은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연인사이에 잠결에 손깍지를 끼고 몸을 겹치며 제 몸의 무게를 상대에게 싣는 일이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런데도 아나킨은 외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포장할 때나 부르는 호칭으로 오비완을 지칭했다. 그와 또 대조되게, 온도 차이가 확실하게, 그는 오비완이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계속해서, 쉴 생각 없다는 듯 따라했다.
오비완이 볼일을 볼 동안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다가, 부름에 응답 하지 않고 이를 닦을 때는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며 떼썼다. 그 떼 쓰는 소리가 얼마나 컸으며 오비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 큰 어른인 20대 청년을 화장실 안으로 들여야 했다. 이를 닦으면서는 웅얼거리며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화장실 밖으로 까지 그 진심어리면서도 어리광스러운 사과는 이어졌다. 오비완이 아침을 맞이할 블랙 커피를 내리는 동안 식탁에서 진중하게 턱에 팔을 괸 채 자신의 스승을 바라보며 또다시 의문의 사과를 했고, 또 제 스승을 따라 커피를 마셨다. 오비완이 아침 식사로 스크럼블 에그를 만들자 옆에서 빵을 토스트기에 밀어 넣으며 이제는 입을 다문 채 눈치를 봤다.
“아나킨, 대체.”
“예?”
“넌 내가 그렇게……,” 오비완은 가스렌지 불을 탁 끄며 말을 골랐다. “그렇게, 좋은 거니? 안절부절 못 할 만큼.”
스크럼블 에그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아나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이내 웃어버렸다.
“아니, 왜 수업 시간에 질문 하는 교수님처럼 그러세요?”
눈치 보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맑은 아나킨의 질문에 오비완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아침 식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기분 좋은 아침 식사 시간은 아니었다. 오비완은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왼손의 감각이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스크럼블 에그까지 만들어 놓고도. 어쨌든 그는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에 큰 불편함 없이 아침을 입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꾸역꾸역, 그리고 조금은 맛있게.
“오비완.”
“왜 그러니, 아나킨.”
“난 말이죠.”
아침 식사가 한창인 순간이었다. 오비완은 아나킨이 구운 토스트를 두 입정도 먹은 후였다.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어요.”
오비완의 푸른 눈동자가, 그리고 녹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어쨌든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가 깜짝 놀라 부르르 떨렸다. 눈꺼풀까지.
“사실 거짓말이에요.” 아나킨의 푸른 눈동자가 아침 햇살을 한껏 머금은 채 미소 짓는 눈꺼풀에 살짝 가려졌다.
“그런 말은 너무 거짓말 같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거짓말이 분명하고요! 소설적 허용이란 말 하지 마세요, 교수님.”
아나킨은 오비완이 소설 분야를 가르치는 n년차 교수라는 사실을 꼬집으며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그런 거짓말 하지 않으려고요. 차라리 그런 말 할 시간에 당신께 실제로 끝내주는 일을 경험시켜주고 싶어요. 그게 더 현실적이죠.”
방금전까지 어딜 가든 졸졸 쫓아오며 미안해요, 죄송해요, 죽상인 개새끼처럼 꼬리를 축 늘어뜨리던 사람 같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오비완은 웃었다, 진지하게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아나킨을 앞에 두고서. 아니, 푸른 눈동자의 아나킨을 앞에 두고서 말이다. 오비완은 조금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것 같았지만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그의 입에서 마저 삼켜지지 않은 스크럼블 에그 파편이 식탁으로 튀었다. 그 덕분에 아나킨도 따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웃음소리가 난무했으니.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오비완은 이메일을 타이핑하며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과를 하다가 문득 이상한 사랑 고백을 늘어놓던 어린 날의 아나킨을. 그리고 어째서인지 눈가가 따끔거리고 축축해지는 감각을 무시할 수 없어 받아들여야 했다.
아나킨.
네가 지금 어디있느지 여전히 알 수 없구나. 알 수 없지만, 나는 상관이 없어. 다만 이 이야기 만큼은 꼭 전하고 싶었다. 그래야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언젠가 네가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었지. 사람에 눈이 먼 연인 끼리는 이따금 중얼거리거나 속삭이거나 소리칠 수도 있는 말이야. 정말이지 진부하지.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무엇보다 빛나는 말이야. 그런데 너는 그 말을 부정했어. 그 말이 소유한 항성 같은 빛을 말이야.
그때 내가 했던 생각은, 나는 너를 위해 정말이지 죽을 수도 있던 순간이 있었단다. 네가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의 순간 외의 순간에서.
여기까지 메일을 쓴 오비완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의심했다. 아나킨은 머나먼 옛 우주에서 있었던 일을 과연 기억할까? 그래서 그런 소설을 썼던 것일까?
오비완은 머나먼 우주에서 일어났던 배움과 우정, 사랑,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비완은 사랑하는 아나킨을 위해 죽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입에 달린 말이 아닌 진심으로.
오비완은 어느 밤 호텔에서 사라졌던 아나킨에게 메일을 보냈다.
넌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거니, 아니면 진실로 죽을 수 없었던 거니, 그런 숨은 의문을 던지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