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Salvatore

날짜. 2021.10.31

작가. Hazel (@_anaobi_)

분야. 소설

00:00 / 04:41

1.

큰 홀에는 남자가 앉아있다. 어디에서나 쉽게 보지 못하는 아주 새하얀 빛의 라펠이 넓은 이탈리아식 정장을 빼입은 남자는 의자에 몸을 반쯤 파묻은 상태였고, 그를 가운데에 두고도 세상은 아주 빠르고 시끄럽게 흘러갔다. 주변으로 무리 지어 모인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치거나 안부를 주고받았으며 길게 뻗은 샹들리에에서 내려온 빛이 유리잔에 담긴 푸른 빛을 반사 시켰다. 패밀리의 화합은 일 년에 한 번씩만 열리는 것으로, 길거리로 나간다면 그 이름만으로 상인들의 가슴을 졸이게 할 수 있는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분위기가 과열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남자. 의자에 파묻은 몸을 이제는 반쯤 일으켜 시가의 갑을 만지작거리는 남자는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듯 무감각해 보였다.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무기질적인 표정 때문일까. 옅게 붉은빛이 도는 금발과 느슨해 보이는 눈꼬리는 부드러운 인상임에도 눈을 낮게 내리깐 남자는 파티의 객이라기보단 주인에 가까운 오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간 마피아들이란, 거만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군. 바라볼수록 속이 뒤틀리는 느낌에 아나킨은 볼멘소리를 굴리며 혀를 찼다. 그러나 그가 그에게 내릴 수 있는 평가는 그것이 전부였다. 조직에서의 위치를 세운다면 아나킨은 말단에 가까웠고, 얼마나 대단한 작자길래 고아하게 앉아있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섣불리 다가갈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두가 그만큼의 지성을 갖추고 있진 못한 모양이다. 어느새 남자의 앞까지 접근한 남자를 발견한 아나킨이 눈을 찡그렸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아나킨의 생각과 달리, 손을 적신 땀을 옷으로 닦아내던 남자는 결심이 섰는지 언뜻 결연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정중하게 묻는다.

“불을 붙여드려도 될까요?”

긴장했다고는 하나 제법 다부져 보이는 체격의 남자는 그가 겪어온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피부에는 옅은 생채기에서부터 깊은 흉터까지 다양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남자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명 아래서 그의 머리는 화려한 금빛으로 반짝였고, 그는 시가를 쥔 손을 느긋하게 돌려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Sciocco(얼간이).”

목소리가 지나치게 미성이다. 아나킨은 신경질적인 대답을 신경 쓰기도 전에 그 목소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목소리의 주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자신의 토치 라이터로 시가에 불을 붙였고, 시가의 끝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연기가 공중에서 뿌옇게 흩어졌다. 명백한 축객령에 남자는 덩치에 맞지 않게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자리를 황급히 떠난다.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조차 시선을 어색하게 돌리며 홀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에 대해 저희끼리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오비완 케노비.’

아나킨은 속으로 이야기 속에 떠도는 그 이름을 따라 읊어 보았다. 오비완이라면 아나킨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다. 소문에 그는 조직의 두뇌라고도 불리는 콘실리에리의 자리에 어린 나이에 올라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으니, 그 오만함은 타당한 것이었다.

아나킨은 분명 오늘 밤 조용하게 제 자리만 지키다가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서투르게 소란을 일으켜 이목을 끌기보다는 몸을 낮추고 서서히 장악해나가는 편이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어떤 불가항력적인 충동이 그를 심장을 저리게 짓눌렀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아나킨은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포식자 앞의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짐짓 태연한 척 남자의 앞에 놓인 금빛 장식의 갑에서 새로운 시가를 꺼내 들고, 엄지와 검지를 맞닿아 그 끝을 가볍게 눌렀다.

“좋은 시가네요.”

주위가 워낙 시끄러운 탓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에서 버석하게 뭉그러지는 시가의 촉감만으로도 아나킨은 기민하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한 번 상대를 무시한 자에게 말을 거는 것은 도박에 가까웠으나 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는지 남자는 시선을 올려 그를 느른하게 바라보았다. 푸른 눈은 고요를 안고 있었다.

“...이 화합의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지.”

남자의 목소리는 재로 된 나뭇가지처럼 건조했지만 왕좌에 앉은 왕처럼 우아했다.

“그렇죠. 얼간이들에 비할 바가 되겠어요?”

“대화를 엿듣는 건 쥐새끼나 하는 행동이지.”

“들리던걸요, 그리고 궁금했죠. 평소에도 말을 그렇게 하시나 해서.”

두 번째 도박 역시 성공이었다. 다소 건방진 대답이었으나 그의 입술에 짧은 실소가 스쳐 지나갔고 미성에는 아까와 같이 두드러진 적의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그는 시가를 깊게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었다. 희뿌연 잿빛의 연기와 함께 몽롱한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건방지긴.”

아나킨은 그를 이미 알고 있다. 잠시간 그는 옷장 틈으로 보았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날은 눈이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의 허리춤까지 차도록 펄펄 흩날렸고, 세상은 하얗고 부드러운 고요로 덮여있었다. 침묵으로 만든 요새처럼 단단하던 평온을 깨트리는 것은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와 단 한 발의 총성이었다. 아래층에서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렸고, 그를 안아 올린 어머니는 다급하게 그를 옷장에 밀어 넣었다으며, 거친 손아귀와 달리 부드럽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밖으로 나와서는 안 돼.' 층계참을 올라오던 급하고도 거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머니가 어떤 남자들과 말다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듣기 힘든 언어가 불씨가 붙은 화약처럼 터져 나왔고, 이어지는 두 발의 총성……. 옷장에 난 작은 구멍으로 보이는 세상은 아주 흐릿하고, 기억은 너무 오래되어 낡게 바랜 지 오래지만, 아나킨은 기억 속에서도 그 푸른 눈만은 또렷하게 떠올려낼 수 있었다. 이미 죽은 시신을 모독이라도 하듯 쓰러진 어머니의 머리에 밀어 넣어지던 두 발의 총탄. 총성이 들렸으나, 새는 울지 않았다. 장롱 안으로 해가 들어찰 때까지도 계속.

마주친 두 눈은 사파이어처럼 푸르고 투명해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를 다시 만나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고향을 떠나 골목과 골목을 떠도는 삶을 연명하며, 그는 줄곧 숨을 죽이고 복수의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예쁘장한 얼굴에 총구를 들이밀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나킨은 쪽지가 있을 주머니를 습관처럼 어루만지며 손가락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다. 평정을 되찾자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다시 귓가를 메웠고, 아나킨은 손을 들어 짓눌린 눈가를 쓸어내었다. 맑게 트인 시야에는 기억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수염은 그처럼 젊은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아나킨이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그냥, 건방지고 시답잖은 생각이죠.”

“말해봐.”

“당신은 그 수염을 깎으면 몇 배는 더 젊어 보일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남자는 소리를 내어 웃진 않았지만, 줄곧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제법 크게 벌어지고 눈가에 작은 웃음이 감돌았다. 그가 아나킨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아나킨을 향해 손을 까닥거리자 그는 허리를 숙였고, 남자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거리를 바짝 좁혀왔다. 목덜미에서 옅은 버번과 시가의 쌉사름한 향이 끼쳐 올랐다. 낮고 연기처럼 혼몽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든다.

"내일 아침 10시, 팔레르모의 양복점 앞으로 최대한 깔끔하게 입고 나오도록 해."

청년은 근사하게 멋들어진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분부대로 하지요.“

 

2.

팔레르모의 거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시칠리아의 중앙에 위치해 항구를 끼고 있는 교통의 중심이기도 했고,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모여 살며 혈기 왕성한 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수대 위로 떼지어 날아가는 새들의 군락을 보며 아나킨은 휘파람을 그렸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십오 년이 넘었고, 어두운 뒷골목을 무작정 떠돌던 시절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기까지는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아나킨은 한 번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때로는 복수가 삶의 강한 원동력이 되는 법이었으므로.

도둑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오물 덩어리 위를 우아하게 지나 거리를 거니는 말끔한 행색의 청년은, 도저히 뒷골목에서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한 장의 와이셔츠를 걸쳤을 뿐이었는데 각이 잡힌 어깨는 그것을 멋스럽게 살려주었고, 햇빛에 살짝 그을린 뺨은 청년을 더욱 생기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그를 곁눈질로, 그러나 너무 경박하지 않게 바라보려고 애썼다. 낯 뜨거운 시선을 느낀 아나킨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몇 번 헛기침했다. 마침 양복점에서 나온 오비완은 그를 보고 이상함과 궁금증이 뒤섞인 눈길을 던졌다.

“왜 그러고 서 있지?”

“너무 멀리에 있으면 당신이 화를 낼 테고, 근처에 있으니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네요."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이어지는 말은 농담이 분명하겠지만, 아나킨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도무지 장난으로 가볍게 흘려보내기가 어렵다. 그가 쓸데없이 화려하게 생긴 얼굴을 가진 건 사실이었으므로 오비완은 괜스레 얼굴을 찡그렸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자신의 곁에 두고 다닌 지도 벌써 일 년 반이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자의 낯짝을 바라볼 때는 길이 들지 않은 빳빳한 가죽을 만지는 감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열린 화합에서 오비완은 아나킨을 처음 만났는데, 새파랗게 어린 얼굴로 시가를 구분하는 법을 아는 청년은 꽤 흥미로웠다. 그다음 날 오비완이 요구한 것은 운전기사로서 자신을 따라다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만나는 상대들이 거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사에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오비완치고는 충동적이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밤의 파티는 지루했고, 시가를 태우는 법을 아는 이를 그냥 두기도 아까운 법이니. 그날 밤의 일을 상기하며 오비완은 옅게 웃었다. 오랫동안 허영심을 자신감을 착각하는 이들은 많이 보았으나, 저렇게 뼛속까지 오만해 보이는 이는 처음이었다.

“하긴, 양복점 앞에 서 있으니 꼭 그림 같군.”

그의 입에서 모처럼 칭찬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는지, 아나킨의 눈이 둥그레진다.

“차라리 모델 일을 하지 그래?”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지만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기도 했다.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지만, 기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오비완은 그처럼 어리고 머리가 좋은 사내가 왜 구태여 더러운 일을 자처하는지 궁금했다. 단순히 명예나 돈을 원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자신보다 열 다섯 살이나 어린 청년에게는 나이에 맞지 않은 절박함이 있었다. 흔하고 값싼 허영심이 아닌, 조금 더 깊고 어두운……. 그러나 시선은 반듯하게 닦여진 구두코에서 멈추었다.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다.

“농담이야. 표정 풀어.”

오비완은 노련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귀신같이 알아차릴 때 아나킨은, 그가 새삼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를 깨닫고는 한다. 그런 농담쯤이야 얼마든지 가볍게 받아칠 수 있었고, 가짜로 꾸며댄 말로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곡을 찔린 건, 그런 말은 꼭 그에게, 복수가 아닌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아나킨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복수 이외의 선택지는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던 그늘에 무엇이 있는지에 궁금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말없이 거리를 걸었고, 차를 세워둔 대로변에서 멈춰 섰다. 이제 와서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나킨은 한참이나 혀끝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을 입안으로 굴리다가 운전대를 잡았다.

*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오비완이 아나킨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 담긴 시선은, 시종일관 무표정에 가깝던 오비완의 얼굴에 제법 잘 어울렸지만, 아나킨은 저것이 다정함이라기보다 동업자 앞에서 오비완이 꾸며내는 얼굴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짧게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다시 포크를 집어 들어 묵묵히 입 안에 넣는데, 오비완의 시선은 제법 오랫동안 그에게 머물렀기에 대화는 잠시 중단된 채로 식사가 이어졌다. 오비완의 사업 파트너가 식당을 통으로 빌린 탓에 그와 오비완, 동업자까지 총 세 명이 머무는 식당에는 장소에 맞지 않은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한참을 집요하게 따라붙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그 이후로 동쪽으로 사업을 확장할지에 관한 공방이 한차례 이어졌고, 사업체의 수익이나 개인의 이득을 계산하는 방식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아나킨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것들이었다. 아나킨은 목을 갑갑하게 조이는 불쾌감에 셔츠의 단추를 느슨하게 풀었다. 눈앞에는 완벽하게 조리되어 나온 음식이 가득했지만 무엇하나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때, 오비완의 얼굴은 창가에서 쏟아지는 미약한 빛에서 벗어나 그늘에 잠겨있었다. 굳게 다물렸다 벌어지기를 반복하는 입술에는 커튼이 바람에 흔들릴 때 요동치는 부드러움이 걸려있다. 그는 아나킨과 달리 내뱉는 단어 하나, 손가락 끝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늘에도 가려지지 않는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어둠에 잠겼다고 하나 여전히 생생한, 마치 빛을 끌어안은 사람처럼……. 상념은 거기서 끊겼다. 회담을 슬슬 마무리 짓고 싶은 모양인지 오비완이 제 쪽을 향해 눈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아나킨은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서, 자네가 말한 조건에는 맞춰줄 수 없어. 내 아량에도 한계가 있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요.”

상대를 타이르려는 듯, 오비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를 줄곧 옆에서 지켜봐 왔던 아나킨은 목소리에 묻어있는 미약한 짜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총이라도 들이밀고 제 말을 들으라 협박하면 될 것을.’

아나킨의 생각은 조금 더 단순하고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가 아는 마피아라는 조직에 더욱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비완은 폭력으로 상대를 굴종시키기보다 대화를 통해 협상을 끌어내려고 했고, 잠시 쉴 틈도 없이 많은 미팅을 잡았으므로 아나킨은 종종 그가 사업가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다짜고짜 운전기사를 시키는 오비완을 의심스럽게 여겼지만, 그 빠듯하고 복잡한 스케줄을 파악한 이후로는 왜 이제껏 없었는지가 의아할 정도였다. 대화를 엿듣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직까지 동업자는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그건 오비완의 끈질김을 그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리라.

‘조만간 또 보겠군.’

그때는 제발 이런 형편없는 식당은 고르지 않기를 속으로 빌며, 아나킨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늘로 일렁이는 작은 균열로부터 애써 시선을 돌렸다.

햇빛 아래를 거닐다 보면 더위를 먹은 감각들이 둔해지기 마련이고, 오래된 나무의 껍질 위로는 매미 떼들이 앉아 주변을 소란케 했다. 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고도 벌써 십 오 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이탈리아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 태어난 아나킨에게는 이곳의 여름은 아직 지나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손에 익지 않은 것들은 손바닥을 뜨겁게 달구었고 건조하고 습한 바람과 함께 매미가 우는 소리가 차츰 커다래졌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을 정도로 차츰, 차츰, 크고 시끄럽게……. 그는 등을 두드리는 감각에 퍼뜩 뒤를 돌았다.

“이봐, 애송이.”

그리고 작열하는 빛 아래에는, 그들에도 가려지지 않는 남자가 서 있다. 다정한 척 구는 답답한 얼굴을 벗어버리고 원래의 채도가 낮은 얼굴로 돌아온 그는 한결 자유로워 보여서 아나킨은 그 모습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언젠가부터 자신의 호칭이 된 애송이라는 말에 딴지를 걸 타이밍을 또 놓쳐버렸기에 그저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불만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오비완이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이 웃는다. 비죽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둥근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에게는 더 어울린다. 그가 물었다.

“술이라도 마시러 갈까?"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처럼, 아나킨은 그저 웃어버리고 말았다.

"거절하진 않을게요."

*

오비완의 얼굴을 알아본 지배인이 그들을 개인적인 방으로 안내하려고 했지만, 오비완은 그걸 거절했다. 그들은 바의 구석진 자리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평일이라 그런지 홀은 제법 한산했고, 아나킨은 투명한 얼음이 띄워진 잔을 흔들었다. 일이 아닌 사석에서 그와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잔을 쥔 손끝에 저도 모르게 힘이 실렸다. 빳빳하게 굳은 것이 분명한 아나킨의 손끝을 오비완이 톡톡 치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눈치 보지 말고.”

“왜 갑자기 잘해주시는 거죠?"

“갑자기는 아니지. 마음에 들어 한 지는 꽤 오래됐어. 그냥 다만….”

“다만?”

“모르는 사람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이 바닥에서는 다 그래, 애송아.”

오비완은 그를 자연스럽게 호칭으로 부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장난스러운 모습이 그의 마음 한편에 있던,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모를 응어리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 바닥을 구르다 보면 싫어도 다양한 족속들과 만나게 되지. 야망이 있는 자들은 차라리 다루기 쉬워. 원하는 게 눈에 보이거든. 그런데 너는 아니야, 너는…,”

오비완이 다시 속삭였다.

“너는 뭘 위해서 이 일을 하지, 아나킨 스카이워커?”

똑바로 쏘아져 오는 눈빛에 꼭 정곡을 찔린 기분이 되어, 아나킨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침착하게,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준비해두었던 답을 입에 올렸다.

“재능이 있으니까요."

"재능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빈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처럼 그를 뒷받침하는 실력이 아나킨에게는 있었고, 그건 그동안 그를 옆에서 지켜본 오비완이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게 이유가 될 순 없다. 삶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지 않으면 사람은 금방 무너지기 마련이다. 오비완은 제 앞에 놓인 잔을 흔들었다. 제가 보기에 아나킨은 이 얼음과 같았다. 거대하고 단단하게 보이지만 열기에 서서히 녹아, 결국 사라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있었다.

"..그러는 오비완이야말로, 왜 이 일을 하죠?”

오랫동안 대답이 없는 오비완 대신해 아나킨이 입을 열었다. 서로를 알아간다는 행위는 위험했다. 그저 꿈에 나오는 악몽에 불과했던 것이 실체를 가진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따뜻해 보인다고 해서 불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 날밤, 파티에서 오비완에게로 아나킨을 이끈 충동과 같은 종류의 호기심이 그의 안에서 일었다.

“글쎄…. 아버지가 조직원이었거든. 태어났을 때부터 장래는 자연스럽게 정해져 있었지. 나는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처지이었고.”

그의 시선이 짐짓 먼 곳을 향한다. 홀을 밝히는 조명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었고, 그래서 역광의 그림자 안에 있는 눈동자가 똑바로 보일 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도 푸른빛이 선명했다. 그 속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에 그 찰나에 아나킨은,

‘후회하시나요?’

하고, 묻고 싶었다. 조직원이 된 것에,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내렸던 선택에 대해 한 번이라도 후회한 적 있냐고. 하지만 동시에 어떤 대답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는 시간이 길었다.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오비완이 다시 가볍게 흩트린다.

“얼음이 다 녹기 전에 마셔. 녹으면 맛없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훨씬 가볍고 시시콜콜했다. 이곳에 살기 전에는 꽤 먼 곳에서 지내 그 흔한 관광지 하나 제대로 놀러 가본 적 없다는 아나킨의 말에 오비완은 안쓰러워하는 것도 잠시 이내 그를 놀리기 시작했고, 아나킨은 당신이야말로 얼굴은 곱상한 도련님 같다는 말로 그의 신경을 긁은 탓에 되먹지도 않은 말다툼이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둘은 꽤 친한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상처입혔다.

당신 또한 평범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불빛이 닿은 자리마다 부드럽게 굴곡지는 얼굴은 위험하다. 얼음으로 만들어져 세상 어느 것도 당신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줄 알았는데 흘러나오는 노래에 눈을 감는 모습은 유순한 구석이 있다. 술기운에 열이 오른뺨에는 불그스름한 혈색이 돌고, 피부 아래 혈관이 깨어나고 폐가 팽창하는 느낌이 선명했다. 밤공기는 여전히 서늘한데도 아나킨은 귓불이 화끈거렸다. 아나킨은 그 홍색의 실로 자아진 석류 같은 뺨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느리게 뻗어 가까이했다.

부딪힘과 동시에, 때마침 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아나킨은 맞닿았던 자리를 애써 떼어내었다.

‘마침내, 내 사랑이 이뤄졌어요. 나는 내 볼에 맞닿는 전율을 느끼죠, 여태껏 알지 못했던 그 열정을 말이에요.’

짧게 올라가는 웃음은 휘파람 소리처럼도 들린다. 잔을 기울이고 시답잖은 이야기로 열을 올리다,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어깨를 적셨기에 우리는 비가 잦아들 때까지 유리로 된 캐노피 아래로 몸을 피했다. 반쯤 취한 채로, 그가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기에, 아나킨도 이에 질세라 가사도 모르는 곡을 아무렇게나 따라 불렀다. 쏟아지는 비와, 리듬, 리듬, 리듬, 흥겨운 재즈 소리…….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동시에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이봐, 애송이.”

하고, 쏟아지는 불빛 아래에서 그가 나를 부른다. 집까지 데려다줘. 흐트러져서 기댄 오비완이 그의 옷깃을 잡고 이야기했다. 바의 안쪽에서부터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당신을 봤던 그날 밤에, 당신이 웃었죠. 그리고 그때부터 주문이 걸렸어요.’ 여름비에 젖어 노랫소리는 점점 희미해지는데 우습게도 감각은 점점 또렷해진다. 버번과 위스키의 쌉사름하고도 찌를 듯한 향기와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살갗에 머물 때마다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선명했고, 아나킨은 오비완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이 자신의 어깨를 타고 흐르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숨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영영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한 욕망을 느꼈고, 가까워진 입술은 거리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맞물렸다.

 

3.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쉽게도 행운의 여신은 아나킨의 편이 아닌 모양인지 아나킨은 그날 이후로 자그마치 열흘이나 그에게 바람을 맞았다. 그들이 항상 만나는 양복점 앞에서도, 식당에서도, 심지어 바에서도 아나킨은 오비완을 만날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는 것이 다분한 행색이었고, 열흘하고도 하루가 지난날 아나킨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팔레르모 거리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단독 주택으로 된 오비완의 집으로 아주 가끔 그를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오비완이 집까지 찾아온 그를 본다면 그에게 완전히 질려서 상대조차 하기 싫어할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도 아나킨은 그를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비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날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의무가 그에게는 있었다.

담이라도 넘을 각오로 찾아왔는데, 끈질기게 회피해온 것치고 문은 쉽게 열렸다. 안쪽까지 이어진 샛길을 가로지르며 아나킨은 많은 말들을 떠올렸지만, 막상 현관 앞에 선 그 얼굴을 마주하자 상투적인 말이 입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잠시간 숨을 들이켰다. 난간에 기대어 비뚜름하게 그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짜증이 어려있었지만, 동시에 죄책감과 비슷한 기색도 감돌았다.

“당신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죠.”

“과거형으로 말하는군.”

“그래요. 처음에는 이해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곱씹을수록 더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

“왜 나를 피하죠? 내가 당신에게 키스한 것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고작 그런 이유로?”

아나킨은 그의 어깨를 억지로 붙들고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눈물을 참으며 그의 곁에서 한발 물러섰다. 줄곧 눌러왔지만 결국 터져버리고 만 감정은 스스로가 놀랄 만큼 난폭하고 제멋대로이다.

“그래요, 주제넘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젠장, 멍청하게 처음 키스해 본 남자애처럼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예기치 못한 감정에 따라온 것은 종속에 의한 패배감이었다. 그는 그날을 잊으려고 노력했고, 나이 어린 애인처럼 매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멀리 떨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비완이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그건 복수와 관계없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그러니 인정했다. 그는 멍청하게도 자신이 죽여야만 하는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는 실수를 저질러버린 것이다.

“너를 밀어낸 게 아니야.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무엇보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너처럼 새파랗게 어린 애랑….”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오비완과 달리, 아나킨은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든 청년이었다. 그러나 고작 나이 차이를 떠나, 아나킨에게 있어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였기에 그는 오비완의 고민이 참 하찮고 바보 같다고 느꼈다. 그처럼 똑똑한 사내도 결국 사랑 앞에서는 실수를 하는구나, 그런 생각에 터져 나오는 눈물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올라왔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요.”

아나킨은 그의 자그마한 고민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숨을 쉬기 위해 벌어진 입 새로 자신의 입술을 밀어 넣었다. 맞닿은 입술은 지난날의 응어리를 지울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

뒤늦게 붙은 불은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침대 위에 몸을 늘어뜨린 채로, 손가락만 까닥여 담배 코에 불을 붙였다. 아나킨이 오비완의 집에 눌러산 지도 벌써 한 달째, 거실에 있던 오비완은 담배 연기가 목까지 들어오는 것을 느꼈는지 창문을 열고 “아나킨.”하고 불렀다. 멀리서부터 대답이 들려왔기에 오비완이 냅다 소리쳤다.

“그 망할 담배는 좀 다른 곳에서 피워!”

그도 종종 집안에서 시가를 태우곤 했으니 아나킨은 너무 차별적인 거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내겠지만, 오비완에게 있어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시가와 담배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오비완은 싸구려 담배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했고, 벽장 문을 열고 위스키를 찾아내었다. 그는 병째로 들어 입에 들이부은 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싸한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내려놓았다.

“아나킨.”

그가 건조한 얼굴로 이름을 부르자, 아나킨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관계를 하고 바로 잠에 들었으니 몸뚱이의 반은 여전히 이불 아래에 처박힌 채였다. 대신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탓에, 잔근육과 탄탄한 조직으로 잘 짜인 몸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내며 뒤틀렸다. 오비완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언제까지 내 집에 머무를 순 없어. 그리고 제멋대로 구는 건 질색이야.”

명백한 축객령에 아나킨의 눈가가 아래로 쳐지자, 그는 반사적으로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스스로가 엄격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눈앞의 이 젊은이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약한 부분을 무섭게 끌고 나오는 탓에 그는 그를 내쫓지도 못하고 번번이 백기를 들어 올리고 만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편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귀찮게 양복점에서 그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둘은 함께 집을 나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음식은 자연스럽게 이인분으로 차려졌고 꽤 부유한 지갑 사정 덕에 오비완의 침대는 성인 남자 둘이 아니라 셋이 들어가도 충분한 크기였기에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물론 늦바람이 무섭다고, 제대로 평온한 상태에서 잠든 적은 드물었기에 오비완은 어젯밤에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던 남자를 조금 질린 기색으로 내려다보았다.

“수염을 자를 생각은 없어요?”

아나킨이 느리게, 오비완의 턱 끝을 당겨 볼을 헤집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정도의 힘이었으나 오비완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눈을 옅게 감고 애정이 어려있는 부드러운 감각을 즐긴다.

“또 엉뚱한 소리나 하는구나.”

아나킨은 그런 오비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난 한 달간,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비완이 잠든 틈을 타 그가 전보나 중요한 정보 따위를 모아 둔 서랍장을 발견했고, 열쇠는 거실 선반의 두 번째 화분의 안쪽 흙더미에 숨겨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러나 계획해왔던 일을 유보하는 동안 다물려 있던 꽃봉오리에서 꽃이 피었다. 여름의 햇살을 듬뿍 받으며, 희고 여린 잎을 틔워낸 물망초에서는 싱그럽고 감미로운 향이 났다.

그래, 그는 노력했다.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면 오비완이라도 나를 싫어할 수 있도록. 그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바로 지금처럼 보란 듯 침대 위에서 담배를 핀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깨달은 것은 결국 자신은 그가 용납할 정도의 사고만 치고 오비완은 그런 자신을 완전히 내치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마음은 피어난 여린 꽃봉오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올곧게 뻗은 목덜미를 바라보며 아나킨은 작게 웃었다.

“오비완, 도망갈래요?”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에 걸린 피부는 부드럽고, 나긋한 손짓은 옴폭하게 파인 빗장뼈를 따라 이어졌다. 그는 아직 앳되고 어려 보였던 기억 속의 남자를 떠올렸지만 동시에 그것을 잊고 싶었다. 기억을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아나킨은 집요하게 그의 오비완을 바라보았다. 환상처럼 잔인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망가서 둘이서만 사는 거예요. 이 지긋지긋한 일도 그만두고.”

창가로 햇빛이 쏟아져 모든 것을 비춘다. 햇빛이 워낙 밝게 부서지는 탓에 그들에게는 커튼의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드리워졌고, 그가 아직 어려서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라며 타박하는 목소리가 작게 이어진다. 사위가 고요한 탓에 세상은 침묵으로 만든 요새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아나킨은 알고 있었다. 창가 너머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바라보다가, 아나킨은 오비완의 목에 팔을 둘러 더욱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4.

기억.

기억이 존재하는 한 그는 과거에 붙들린 망령과도 같다.

아나킨은 잠든 어머니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던 순간을 회상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는데, 손가락 끝에 맞닿은 온도는 햇볕에도 결코 따뜻해지지 않았다. 탄약이 식은 곳에서는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냄새가 났고,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부모님의 눈을 감겨드리는 게 전부였다.

나이가 들어서, 그는 다시 고향의 집에 방문했다. 열차를 타면서 기억을 더듬었지만, 집이 어떻게 생겼지 따위의 세세한 기억들은 너무나도 희미했다. 고향에 남겨두고 온 것은 결국 식어가기 시작한 시체에서 나는 서글픈 향기나, 탄약의 차가움 따위이다. 그는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흙더미를 쓸었다.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사는 사람에게서 구 년 전 일어난 화재로 땅 위에 남아 있던 모든 것이 불살라 없어졌다고 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곳도, 나아갈 곳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폐허이다.

'어두워….'

달빛 하나 들지 않는 방은 아나킨을 무도한 침입자로 만들었다. 언제 오비완이 깨어나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아나킨은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키며 벽을 더듬어 한 발을 내디뎠다. 서랍장 위에 놓인 램프를 집어 들고 불을 붙이자 시야가 조금 트인다. 아나킨은 굳게 닫긴 서랍의 구멍이 난 부분을 찾아 더듬다가, 홈에 맞추어 열쇠를 밀어 넣었다. 흙이 묻은 열쇠는 딱 맞게 들어갔다.

달칵,

하고,

열리는 소리가 그때만큼 반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서랍 속에 들어있는 장부에는 죽은 자들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들이 빼앗은 사람들의 목숨과 명목이 너무나도 간결하게, 어떠한 추모도 느낄 수 없이 까맣게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작 한 문장으로 적혀진 채로 잊힌 목숨들과,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삶은 별 다를 바가 없다. 복수로 규정된 삶은 간결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슬픔이나 희망을 대신해서 그를 살아가게 했으므로. 하지만 그를 가르치려 드는 그 푸른 눈은 늘 다른 것을 말한다.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배반한다. 철저하게.

'피아노 치는 법을 알려줄게.'

라고 말했다. 입술을 매만지고 떨어져 나가는 손끝은 다정했고, 그에게선 언제나 위스키의 쌉사름한 향이 났다. 메마르고 건조한 낙엽처럼 코를 버석하게 찌르는 시가의 맛이 머물렀다. 여름비에 어깨를 적셨던 날이 떠올랐다. 그에게서는 자꾸만 그가 누리지 못했던 삶이 상기되는 탓에, 아나킨은 손끝을 말아쥐었다. 가볍게 타이르는 목소리, 그건 꼭 그에게 복수가 아닌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언젠가 아나킨이 그의 복수에 성공한다면, 장부에는 또 다른 기록이 새겨질 것이다. 그들의 죽인 자들의 이름과 나란하게, 공정한 죽음의 꼬리표를 달고 새겨질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사랑은 기록되지 않으므로. 그래, 그것뿐이다.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감정일 뿐이다. 아나킨은 총을 집어 들었다.

창밖에서 들어온 빛은 서글프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다. 아주 시린 푸른 빛으로 뒤덮인 하늘에는 손톱달만이 빛나고 있었다. 아나킨은 침대 위에 누워 잠든 오비완을 바라보며, 총구의 끝을 그를 향해 겨누었다. 여기서 당신을 죽이고 접선지로 나가 다른 이들을 만난다면 그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빛 아래에 있는 것은 여전히 당신이다.

아나킨은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증오는 그에게 총을 들라 말하지만 사랑은 그에게 용서를 종용한다. 그리고 휘파람처럼 종종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갔던 당신의 웃음소리…….

그러나 당신의 미소, 무뚝뚝한 입가에 나른하게 휘어지며 떠오르는 당신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정말 온 세상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5.

그날은 정말 이상했다.

오비완이 눈을 떴을 때, 곁에 당연히 있어야 할 아나킨이 없었다. 자는 그를 구태여 깨우지 않고 음식을 사러 나가는 일은 종종 있었으므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위화감을 느꼈다. 불안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해가 하늘의 끄트머리에 걸릴 때까지 아나킨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러던 도중에 믿을 수 없는 전보가 도착했다. 패밀리의 보스와 그를 항상 옆에서 보좌하던 남자가 총살을 당해 시체로 발견되어있다는 글씨가 휘갈겨서 적힌 쪽지에는 이어서 사망한 장소와 시각이 적혀있었다. 파벨로티, 새벽 세 시. 그리고 접선지로 지정된 술집으로 찾아와 총을 쏘고 달아난 남자는, 그들이 이미 그곳에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당당하고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는 주인의 진술이 짧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보스씩이나 되는 거물의 움직임을 말단 조직원이 알 리가 없었다. 오비완이 그들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가 아니라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대상은 아마 오비완이었으리라. 아니면……, 그는 서랍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열쇠로 굳게 닫혀있어야만 하는 서랍은, 손가락을 당기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열렸다. 파헤쳐진 것이 분명한 서랍장에는 장부에서 찢어낸 듯한 단 한 장의 종이가 남아 있었다.

그건 아직 오비완이 조직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일어난 일이었다. 배신자는 죽음으로 갚는다. 그건 조직의 불문율이었고, 오비완으로서는 거역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므로 오비완은 아직도 손끝을 뒤덮던 차가움과 총알이 총을 벗어나 날아갈 때의 반동에서 오는 강한 충격을 기억하면 몸을 떨었다. 동상이 걸릴 듯 살을 에는 추위보다 더 그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죄악감이었다.

이것이었나, 아나킨이 품고 있는 어둠은. 오비완은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려 보려 하다가도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그의 배신에 대해 서글픔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 얼굴을 떠올리면 문득 동정해버릴 것만 같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아나킨…….’

오비완은 침음성을 흘렸고,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확한 폐허였다.

 

6.

오비완의 집에 들어와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었다. 취향이 제법 잘 맞는다는 것 알게 된 이후로 그들은 종종 가볍게 술을 걸쳤으나 그것이 꼭 승부로 과열되어 취한 채로 집으로 들어오곤 했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침대가 아니라 카펫 위에 새우처럼 웅크려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자 오비완이 '일어났니? 취하지 않았다고 우기더니 아주 잘만 자더구나.'하고 이른 아침부터 그의 속을 긁었고, 아나킨은 눈을 찡그리며 '그렇게 마시고 멀쩡한 쪽이 이상한 거죠.'하고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조용히 말해. 골이 아파 뒤져버릴 것 같으니까.' 하고 똑같이 성을 내는 모습이 퍽 그다워서 아나킨이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오비완은 그게 또 시끄럽다며 타박했다.

첨탑에 걸린 시계가 새벽 다섯 시 반을 조금 넘게 가리켰으나, 하늘이 온통 먹구름이 뒤덮인 탓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빛은 미약했다. 대신 밤과 아침의 기로에 서 꺼져가는 가로등 사이에서도 아직 빛을 내며 깜박거리는 것이 있었고, 아나킨은 그곳을 아주 오랫동안 응시하며 기다렸다. 어쩌면 오지 않을 남자를 기다렸다. 운명처럼, 오비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다. 도시에 드리워진 파란 불빛들, 이 모든 불빛은 당신을 위해 반짝이는 것 같다고.

쏟아지던 빛 아래에 있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첫 키스가 떠오른다. 그의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굴종시키는 부드러운 입술이 떠오른다. 낮게 내리깐 속눈썹이 떠오른다.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무수한 여름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모든 상념이 당신에게 이어진다…….

“아나킨.”

빛 아래 있는 것은, 여전히 당신이다.

“네가 가진 선택지는 두 가지야. 해명을 하던지, 내 손에 죽던지.”

흔들림 없는 표정은 죽음을 각오한 듯 단단했지만, 선택의 기회를 주는 오비완의 태도는 무르기 짝이 없어 아나킨이 웃었다. 만약 그가 오비완의 입장이었다면,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마주치는 순간 그를 죽여버렸을 테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다. 당신은 선택하라고 했지만, 한 번도 나의 삶에서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 적은 없었다.

“기억하세요? 나한테 아무도 믿지 말라고 가르쳐준 건 당신이었어요. 하지만 바에서, 당신은 재즈와 블루스를 불렀죠.”

"..."

"함께 떠나요, 도망쳐서 살아요.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을 곳으로."

아나킨이 속삭인다. 먹구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와 함께 끊임없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추위 때문인지, 슬프기 때문인지, 분노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아나킨의 어깨는 여리게 떨리고 있었고 오비완은 아나킨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더 가까이,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마침내 아나킨이 애원하듯 속삭였다.

"피아노를 알려준다고 하셨잖아요."

"..."

"그러니까 오비완, 제발. 내 말을 한 번만 들어줘요."

살인자치고는 부드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오비완은 고개를 내저었다. 짧게, 그러나 단호하게.

"다 버리고 떠난다면, 우리 곁에 뭐가 남지? 잘난 네 사랑?"

"그거론 부족한가요?"

"..."

"나는 정말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알아요. 우습겠죠. 복수해야 할 사람한테 반한 꼴이라니……."

아나킨의 말이 빨라졌다. 그는 호흡 하나를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진 것 같다가도,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으면 영영 떠나기라도 할 것이지, 양복점 앞에서 미련스럽게 그를 기다리는 행동에는 계산되지 않은 애틋함이 있었다. 사랑에 빠진 얼굴은 서글프고 음울해서, 오비완은 차라리 그 눈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참 모든 것이 쉬웠을 것이다.

비는 계속 이어졌고, 그들은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 도망치는 길은 언제든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오비완은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어 손아귀에 단단하게 쥐었다. 묵직하고도 차가운 무게는, 자신의 신념의 무게이기도 했다. 이 바닥에서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아남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깨달은 날, 오비완은 공포와 죄악감에 떨면서도 그 감각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죄를 마주할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도망쳐서는 안 되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애송아. 총을 들어. 시작한 일을 끝맺어야지."

이 순간만큼 그들은 연인이 아니었다. 아나킨은 옷장에 숨어있던 어린아이였고, 오비완은 첫 살인을 경험한 청년이었다. 그날 고향에 흩날렸던 눈처럼, 여름의 시칠리아에는 비가 내렸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거세고 산발적인 비가.

"나를 사랑했어요?"

오비완은 그게 지금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서로의 이마를 향해 총구가 향한 채로, 언제라도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끝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직도 사랑을 이야기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청년의 얼굴은 너무나도 절박해 보여서, 오비완은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순간에도 그의 가슴을 충동질하고 약하게 하는 애정을 떼어내듯 입 밖으로 뱉어낸다.

“너를 사랑했어.”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피아노를 가르쳐주겠다는 말, 그것 또한 진심이었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만났다면 네가 배우지 못한 삶의 많은 부분을 가르쳐주겠지.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게 세상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흙탕물에 더럽혀지고도 오비완의 눈은 여전히 맹렬한 푸른 빛이었다. 그 단단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아나킨은 깨달았다.

“나는 당신을 정말로….”

좁혀도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에서, 우리는 경계선 위를 떠도는 사람들처럼 사랑을 했다. 거친 비에 자꾸만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눈앞이 흐려진다. 총구의 방향이 아주 미묘하게 어긋난다. 아나킨은 그가 노래를 부를 때 내는 아주 낮은 음을 떠올린다. 바의 안쪽으로부터 새어 나오던 희미하고 부드러운 노랫소리를 떠올린다…. '마침내, 내 사랑이 이루어졌어요.' 침묵으로 만든 요새가 깨어졌던 그 날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깨트리는 것은 단 한 발의 총성이었다. 그러나 오비완의 것은 아니었다. 오비완의 총은 그보다 조금 느리게 발포되었다. 아나킨은 문득, 오비완의 얼굴을 타고 내려온 빗방울이, 제 어깨를 적시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나의 목표, 나의 사랑, 내 삶. 그가 짧게 속삭인다. '당신을 정말로 증오했어요.' 그가 삶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저 푸른 눈이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 2021 by AnaobiModernAUproject2021.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