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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chhike

날짜. 2021.10.31

작가. 일사 (@1414IL_SA)

분야. 소설

00:00 / 03:04

1.

처량하게 붉고 어두운 황혼이 내려앉고 있는 도로가에 서 있는 청년을 발견했을 때, 오비완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정말 사람이 맞는지 잠시 의심했다. 붉은 저녁놀은 멀리서 봐도 지나치리만치 잘생긴 청년의 얼굴에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드리웠고, 외로이 서 있는 그림자는 너무 쓸쓸해서, 그 청년은 사람보다는 마치 검은 산의 정령처럼 보였다. 그가 알기론 이 근처에 사람이 사는 곳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타운과의 거리도 거의 30km. 저 청년이 어디에서 왔는지 도무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오비완은 결국 그의 차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을 조금 지나쳐서 차를 멈춰 세우고 말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 청년이 정말 괴물이나 무엇인가 수상쩍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가장 가까운 타운에서도 30km는 떨어진 이 길에서 밤을 보내야 할 터였다. 이제 길에서 얼어 죽은 사람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는 계절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밤이 되면 꽤 추웠고, 이 근방에서는 야생 곰도 종종 나왔다. 오비완이 차를 세우고 가만히 서 있자 눈치를 보며 서 있던 청년은 종종거리며 다가와 기운차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와, 살았네요. 감사합니다. 3시간도 넘게 기다렸는데 아무도 지나가지 않더라고요. 아무리 걸어도 마을은 안 나오지,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가로등 하나 없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했어요.”

청년은 차에 오르자마자 쾌활하게 수다를 떨었다. 싸늘한 바람에 붉게 달아오른 뺨에서는 지친 기색이 언뜻 보였지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떨어지는 모래 먼지에 사과하며 부산스럽게 어깨에 진 가방을 내려놓는 모습을 활기찼다. 오비완은 허름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보니 더 박력 넘치는 미모의 청년을 약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만난 청년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잘생겼다.

“아, 아직 제 소개도 안 드렸네요. 아나킨 스카이워커라고 합니다.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웃옷 자락에 손바닥을 몇 번 문지른 청년이 오비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초 뒤에야 그것이 악수라는 것을 깨달은 오비완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손을 맞잡았다.

“오비완 케노비입니다. 어디까지 가려고 하셨나요?”

 

아나킨은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타운이나 도시에 내려주면 감사하겠다고. 오비완은 일단 차를 출발시켰고, 아나킨은 가만히 있는 것이 몹시 심심한 듯 옆에서 여러 이야기를 떠들었다. 어째서 그가 차도 그다지 지나가지 않는 이 들판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었는지, 여기에 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에 비해 내용에 알맹이는 없어 오비완이 아나킨에 대해 새로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나킨이 떠돌아다닌 지 퍽 오래되어 보인다는 점과 떠드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것뿐이었다.

처음엔 오비완도 가장 가까운 타운에 아나킨을 내려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나치는 곳이기도 했다. 작은 타운이었지만 여행자가 머무를 수 있는 모텔이 타운 외곽에 하나쯤은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나킨은 돈이 없어 보였다. 오비완은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지적했다.

“타운에 도착하면 머무를 돈은 있나요?”

 

오비완의 질문에 아나킨은 눈에 띄게 움찔했고 오비완은 속으로 탄식했다.

“일자리를 구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시간이 늦었어요. 당장 오늘 밤 머물 곳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 정도 돈은 당연히 있죠.”

허공을 헤매는 눈동자와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보며 오비완은 아나킨의 말이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비완은 곁눈질로 아나킨을 살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깊었다. 우수에 찬 얼굴이 또 근사하긴 했지만 그 근심은 오비완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히치하이킹. 길에서 만난 사람이다. 조금 후 도착할 타운에 내려주고 나면 그의 인생에서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 그대로 끝날 인연.

오비완은 괜히 오지랖을 부리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타입에 가까웠다. 이만큼이나 아나킨의 사정에 간섭한 것만 해도 오비완에게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매우 드문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오비완이 이다음에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어떤 알 수 없는 충동 때문이었다. 방금 만난,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 어린 청년을 어쩐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그런 충동.

“괜찮다면,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않을래요?”

아나킨의 얼굴에 어리는 약간의 경계심에 오비완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괜찮게 생긴 어린 청년에게 집에서 자고 가지 않겠냐고 유혹하는 중년이라니. 그것도 한참 어린 데다가 돈도 없어보이는 히치하이커를. 오비완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제자 같아서 한 말이에요. 근방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거든요.”

젠장, 어떻게 말해도 쓰레기 같군, 오비완은 핸들에 이마를 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운전 중만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터였다.

“아닙니다. 흘려들어요. 괜한 말을 했네요.”

역시 오지랖을 부려서 좋을 일이 없다. 오비완이 입술을 잘근 깨무는 찰나 아나킨이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신경 써주셔서 제가 더 감사한걸요.”

아나킨의 눈치를 살피던 오비완의 눈과 아나킨의 눈이 마주쳤다. 민망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오비완의 표정을 보았는지 아나킨은 활짝 웃었다.

“그럼 오늘 하루만 신세 져도 될까요?”

 

❖ ❖ ❖

 

오비완의 집은 아나킨을 원래 내려주려던 작은 타운을 지나쳐 조금 더 달린 후에야 도착할 수 있는 작은 도시 안에 있었다.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간신히 타운에서는 벗어났다 싶은 규모의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는 동네는 해가 지고 나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오비완의 차 소리가 유난히 요란하게 들렸다.

오비완은 작은 단독주택 앞에서 천천히 차의 속도를 줄였다. 옆집과 또 그 옆집과 같은 디자인으로 지어진 흔한 집이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오래되었는지 외관은 살짝 낡았다. 그래도 구색은 맞추어 작은 마당이 딸려 있었지만, 관리하지 않아 잔디가 볼품없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들어오렴”

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리고 있자 오비완이 아나킨을 잡아끌었다. 어색함과 민망함이 가득했던 대화 이후, 어떻게든 어색함을 타파하고자 아나킨이 노력한 보람이 있어 처음보다는 한결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오비완은 들어가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방을 들여다보는가 하면 화장실에 들어가 잠깐 우당탕거리더니 2층에 올라가서는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오비완이 그러는 사이 아나킨은 천천히 걸어 다니며 집 안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1층에는 욕실과 침실로 보이는 방 하나, 거실과 식당이 딸린 주방이 있었었는데 모두 황량하다 싶을 정도로 생활감이 없었다. 아마 집을 렌트할 때 기본으로 딸려왔겠다 싶은 가구들 외에는 말라 죽은 화분 몇 개와 쌓여있는 책들이 있는 정도였다. 아나킨은 열려 있는 문으로 살짝 침실 안쪽을 훔쳐보았다. 침구가 구겨진 채로 방치되어있는 침대와 옷가지가 걸려있는 행거 외에는 역시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없었다.

“오늘은 소파에서 자야 할 것 같구나, 아나킨.”

오비완의 목소리에 아나킨은 후다닥 침실 문에서 멀어지며 오비완을 돌아보았다. 오비완은 머쓱한 얼굴로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손님방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말이다. 온통 먼지투성이었어. 내가 데려와 놓고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재워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오비완 아니었으면 이 추운 날 길에서 잘 뻔했어요.”

하나뿐인 소파 위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아나킨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재워주셨으니 제가 밥이라도 할게요. 저 요리 썩 괜찮게 잘해요.”

아나킨의 말에 오비완은 미묘한 표정으로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오비완이 계속 말이 없자 아나킨은 오비완 옆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어 냉장고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나킨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오비완을 바라봤고 오비완은 시선을 피했다. 냉장고 안에는 물 몇 병과 맥주 몇 캔이 달랑 들어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변명하는 오비완의 낯이 살짝 붉었다.

“도대체 뭘 드시고 사시는 거예요.”

아나킨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오비완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핸드폰을 찾았다.

“뭔가 배달이라도 시켜야겠구나. 중국요리 괜찮니?”

“뭐든 좋아요. 지금이라면 영국요리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걸요.”

 

오비완이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애용하는 가게는 빠른시간에 따뜻한 음식을 오비완의 집 현관까지 대령했다. 아나킨은 그의 장담대로 음식이 담겨있는 종이박스까지 핥아먹을 기세로 식사에 집중했다. 배가 두둑해지자 분위기는 좀 더 느긋해졌다. 오비완은 물과 술만 달랑 든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맥주? 아, 그러고 보니 몇 살인지 물어도 될까? 내가 미성년자에게 술을 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올 4월에 스물한 살 됐어요. 한 캔만 주세요.”

아나킨은 오비완이 던진 맥주를 공중에서 가볍게 잡아챘다.

“생각보다는 어리구나.”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 같은데요.”

“성숙해 보인다는 뜻으로 이해하렴.”

주고받는 농담이 어느새 꽤 격의 없었다. 아나킨은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이 남자가 꽤 익숙하게 편하다고 느꼈다. 오비완은 부드러운 인상대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내뱉는 말들은 날카롭게 유머러스해 받아치는 재미가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외로웠지만 그들이 있는 식탁 주변은 온기가 돌았다. 대화가 물처럼 이어졌다. 하지만 둘은 그 밤의 끝까지 서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비완이 입고 있는 옷과 타고 다니는 차에 비해 왜 이렇게 초라한 집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왜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집을 내버려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

오비완 역시 가출했다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고, 인생의 시련을 겪었다기엔 지나치게 젊은 아나킨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이며 언제까지 그럴 것인지도.

식사시간을 따뜻했지만 길진 않았다. 아나킨은 침실로 들어가는 오비완을 배웅했다.

“주무세요, 오비완.”

“너도, 좋은 꿈 꾸렴.”

 

2.

아나킨은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었다. 눈을 굴려 머리 위쪽을 바라보자 커튼조차 달려 있지 않은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셨다. 이번엔 눈을 아래로 굴리자 허름한 담요가 덮여 있는 몸이 좁은 소파에 잔뜩 구져겨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온몸에서 뻐근함이 몰려왔다. 멍하니 일어나 앉아 머리를 긁고 있으려니 침실에서 오비완이 고개를 내밀었다.

“일어났니? 정신없이 자더구나.”

“네…”

아, 어제 차를 얻어 탔지.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아나킨은 여전히 약간 멍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비완은 퍽 귀여운 것을 보는 것처럼 웃었다.

“아침은 시리얼이란다. 괜찮지? 어서 씻고 나오렴.”

 

아나킨이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나올 때쯤, 오비완은 옷을 다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출근하세요?”

“그래, 밥은 먹고 살아야지.” 오비완은 씩 웃었다. 그리고 잠깐 사이를 두고 물었다.

“오늘, 떠날거니?”

오비완의 말투는 마치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서 일말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아나킨도 어쩐지 오비완의 곁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의 옆에 머무르는 것은. 비록 웬만한 모텔보다 더 삭막한 집이긴 했지만, 그래도 집이었다.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대가를 내야하고, 누구든 왔다가 또 떠나가는 곳이 아닌, 집. 누군가와 함께 사는 집. 고향과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 아나킨은 어쩐지 향수를 느꼈다. 아나킨은 조금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괜찮으시면 조금 더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자신이 내뱉은 당돌한 말에 스스로 놀라 아나킨은 횡설수설 이유를 덧붙였다. 여기는 규모가 조금 있는 도시니 일자리를 찾기도 쉬울 거고, 돈을 모을 때까지 정착했으면 하고, 있는 동안 얌전히 잘 있을 거고, 집안일도 도울 것이고… 아나킨의 폭주를 멈추며 오비완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야 좋구나. 마침 적적하던 터에 잘 됐어. 일자리는 여유 있게 알아보렴.”

 

❖ ❖ ❖

 

오비완에겐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료가 많이 없는 편이었다. 직업 자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란 것도 있지만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는 성정 때문에 더 그랬다. 어떤 집단에도 서글하게 곧잘 섞여 들어갔지만 정작 친한 사람은 잘 만들지 않는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친하지 않은 동료들이라도 어제 오비완이 벌인 일을 들었다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요즘 시대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주워오다니! 요즘 젊은 애들이 얼마나 무섭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어쩌자고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였냐는 충고까지. 새틴이 알았다면 오비완은 벌써 등을 열두어 대는 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비완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아나킨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공부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학생들의 머릿속에 셰익스피어 문학의 아름다움을 쑤셔 넣으며 오비완은 내내 아나킨 생각을 했다. 황혼 속에 혼자 서 있던 쓸쓸한 모습이라던가, 타오르는 것 같은 햇살 속에서 그를 바라보던 순간의 눈빛 같은 것들을. 세상 어디에도 뿌리박지 못하고 물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그의 불안함을. 오비완은 그 불안함을 붙잡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 피할 수 없는 것.

 

어쩐지 조급해지는 마음에 오비완은 예정했던 시간보다 좀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갔다.

“아나킨?”

집은 조용했다. 오비완의 부름에 답하는 사람도 없었다. 떠났나? 자연스러운 추측과 함께 허전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침에 했던 적적하다는 말은 빈말이었지만 어쩌면 사실은 진실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들은 휘적거리던 걸음이 바닥에 있던 아나킨의 가방에 부딪혀 멈춘 순간 깨끗이 사라졌다. 이상하게 안도감이 솟아올랐다. 그것이 얄궂어 오비완은 괜히 아나킨의 가방을 발로 한 번 툭 찼다.

“오비완?”

등 뒤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비완은 장난치다가 들킨 꼬마가 된 기분으로 돌아보았다. 막 현관에 들어온 아나킨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오비완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자연스럽게 웃었다.

“일자리는 구했니?”

“아, 시내 정비소에서 잠깐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나킨은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씩 웃었다. 정말로 그날 안에 일자리를 구해올 줄은 몰랐던 오비완은 살짝 놀랐다.

“차에 대해서 잘 아나 보지?”

“그럭저럭 남들 아는 만큼은요?”

“여러모로 잘됐구나.”

오비완은 이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정비소에서 일하던 형편없는 솜씨의 직원에 대해 떠올렸다. 차를 고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망가트리러 가는 수준이었지. 이 동네 사람들은 차가 고장 나면 옆 동네의 정비소에서 견인차를 부르는 것이 차라리 더 싸게 먹힌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 직원이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지나치게 호탕하고 의리파인 사장 덕분이었는데, 드디어 그 사장의 질긴 인내심도 끝이 난 모양이었다.

“전에 일하던 직원이 정말 별로였나 봐요. 뭐라더라, 연습시킨다고 차를 맡겼는데 차를 폭발시켰다나.”

오비완은 그제야 며칠 전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며 소방차들이 몰려왔던 이유를 알고 이마를 짚었다.

“…네 솜씨가 좋기를 기도하마.”

아나킨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웃더니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할게요. 식재료를 조금 사 왔어요. 물가가 나쁘지 않던걸요?”

“돈이 어디에서 나서?”

“가불을 좀 받았어요. 사장님 마음이 너그러우시더라고요.”

그런 사람이니 그렇게 솜씨가 엉망인 직원을 3년이나 데리고 있었을 것이다.

“돈을 벌기도 전에 쓰면 언제 돈을 모으려고 그러니.”

“다 믿는 구석이 생겨서 그렇죠. 저녁 좀 대접한다고 쫓아내진 않으실 거죠?”

씩 웃는 아나킨의 얼굴이 청량했다.

 

❖ ❖ ❖

 

낯선 주방이었지만 아나킨은 별로 어렵지 않게 요리를 만들었다. 사 온 고기를 굽고, 파스타를 삶고, 샐러드를 만드는 손길이 능숙했다. 원래도 요리는 아나킨의 담당이었다.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저녁을 준비해두면, 어머니는 기쁜 얼굴로 아나킨의 이마에 키스해주곤 했다. 리듬감 있게 손을 움직일수록 아나킨은 차오르는 짙은 향수에 숨이 막힐 것 같다고 느꼈다.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끓어오르는 물의 수증기. 익어가는 고기의 냄새. 과거의 풍경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웠지만 동시에 괴로웠다. 그가 집에 두고 왔던 것들이 그의 발목을 잡아 오는 것이 느껴져 다시 한번 아나킨은 모든 것을 다 두고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 아나킨을 현실로 꺼내온 것은 옆에서 허둥대고 있는 오비완이었다. 평소엔 주방에 들어오지 않는 듯, 아나킨이 접시며 냄비의 위치를 물어볼 때마다 눈에 띄게 버벅대며 온 주방의 찬장을 열어 재꼈다. 결국 아나킨은 잠겨있던 생각에서 벗어나 실컷 웃다가 있어봤자 방해가 된다며 오비완을 주방에서 내쫓기에 이르렀다. 오비완은 “그래도 내가 집주인인데”라고 웅얼거리다가 얌전히 테이블을 세팅하러 갔다.

 

아나킨이 뚝딱뚝딱 만들어낸 요리는 특별히 훌륭하지는 않아도 모양새벼 맛은 그럴싸했다. 분위기는 금새 화기애애해졌다. 요리에 곁들여 오늘도 오비완이 꺼내다 준 맥주를 마시며 아나킨은 살갑게 웃었다.

“머물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비완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기분이 한껏 풀어진 아나킨은 포기하지 않았다.

“길에서 주워온 사람을 재워 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계속 있어도 된다고 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정말 얌전히 잘 있을게요.”

“오히려 내가 믿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해야겠구나. 솔직히 다짜고짜 자고 가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좀 수상하잖니.”

어제 차 안에서의 괴멸적으로 어색했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둘은 잠깐 웃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침묵이 흘렀다. 밤은 고요했고, 불빛은 따뜻했다. 아나킨은 턱을 괴고 오비완을 바라보았다.

빛이 부드럽게 오비완의 윤곽을 더듬고 있었다. 모양 좋은 입매는 부드럽게 풀려 자연스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고, 생각에 잠겨 있는 눈매는 엄격했지만, 그 색은 온화하게 부드러웠다. 살짝 노란빛이 도는 조명 덕분에 거의 황금색으로 보이는 수염은 아주 부드러워 보여서 아나킨은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편안한 분위기에 잠겨 아나킨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툭, 던졌다.

“오비완은 어쩐지 저한테 좀 미안해하는 것 같아요.”

창문 밖 풍경 어드메를 헤매던 오비완의 시선이 아나킨을 향했다.

“이상하죠? 그럴만한 이유는 전혀 없는데 말이에요.”

아나킨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어쨌든,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오비완.”

 

3.

아나킨은 마치 처음부터 오비완과 함께 지내던 사람인 것처럼 오비완의 삶 속에 녹아들었다. 먼지투성이였던 2층의 손님방을 청소한 다음 가방을 풀었고, 오비완에게 부탁해 몇 가지 식기를 주방에 더 채워놓았다. 식탁 의자에 걸쳐진 모르는 옷가지를 볼 때, 거실과 식당에 채워지는 소소하고도 잡다한 물건을 볼 때마다 오비완은 깜짝깜짝 놀랐지만, 곧 놀라지 않게 되었다.

 

아나킨은 정비소 말고도 여기저기에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했다. 작은 도시였지만 최근의 경기는 나쁘지 않아 소소한 일자리는 넘쳐났다. 덕분에 아나킨은 아침 일찍 나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오비완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근 학교들의 대리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교사들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라 스케줄은 들쭉날쭉했지만, 워낙 평판이 좋고 넓은 지역을 커버하고 있어 일이 아예 없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둘이 집에서 마주치는 것은 주로 저녁이었다. 아나킨은 요리를 잘하고 또 좋아했다. 시간이 남으면 간단하게 먹을 저녁들을 만들어 오비완을 기다렸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도 오비완은 아나킨이 만든 음식을 잘도 먹었다. 조금 시일이 지난 후에야 오비완은 사실 이 도시로 온 이후 처음으로 외식과 배달음식을 끊었다고 고백했다.

가끔은 아나킨은 지금까지 어떻게 혼자 살았냐고 오비완을 놀렸다.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오비완의 반박에 아나킨은 코웃음 쳤다. 하지만 눈에 빤한 대리교사의 수입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빛이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난 정원에 아직 머무르고, 이르게 켜진 가로등이 집 안으로 빛을 드리울 때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옮겨 술을 마실 때도 있었다. 살림에 무관심한 오비완 덕택에 거실에는 이 집에 포함되어있는 긴 소파 하나만 달랑 있었는데, 둘은 나란히 앉아 술을 홀짝이곤 했다.

밤이 깊어가도록 어깨를 스치며 술을 마시는 동안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말이 없을 때도 많았다. 오비완의 집에는 TV조차 없었기에 이럴 때 정적을 메우는 것은 희미한 풀벌레 소리, 이따금 지나가는 차 소리, 가끔은 옆집에서 들려오는 흘러간 사랑 노래 같은 것들이었다. 아나킨은 이 불안정한 침묵이 싫지 않았다.

 

그날은 비가 왔다. 봄의 끝자락에 내리는 비에서는 희미하게 여름 냄새가 났다. 오비완은 거실 창문 2개를 모두 활짝 열어두었다. 젖은 공기가 잔잔한 파도처럼 아나킨을 적셨다. 아나킨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팔꿈치를 천천히 주물렀다. 오비완의 시선이 아나킨의 오른팔로 향했다.

“어디 다쳤니?”

“네? 아,”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아나킨은 실없이 웃으며 팔꿈치에서 손을 뗐다.

“옛날 상처 때문에요.”

그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상처에 대한 것이었다.

“혹시 말하고 싶지 않은 거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아나킨은 조심스럽게 오비완이 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이 꽤 오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아나킨은 오비완의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아니라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이렇게 설명하는 거. 별거 아니에요. 교통사고가 났어요. 회복까지 한참 걸리긴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깔끔하게 나았어요.”

“많이 다쳤어?”

“작은 상처가 아니긴 했죠.”

아나킨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 지나간 일인 것처럼. 마치 별 것 아닌 것처럼 가볍고 산뜻하게. 그 사고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원망하기엔 이제 너무나 과거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비완은 아나킨의 가벼운 태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도 아픈 건 아니고?”

아예 마시던 잔도 바닥에 내려놓고 오비완은 아나킨의 팔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살짝 술기운이 오른 오비완의 손이 뜨거웠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가 아나킨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아나킨은 충동적으로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오비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다치기 전에는 미식축구를 했어요.”

오비완이 아나킨을 올려다봤다.

“나름 잘 나갔어요. 쿼터백이었고. 제가 쿼터백이었던 동안 우승 놓친 적 없어요. 시니어 땐 경기마다 근처 대학팀 코치들이 경기를 보러 와서 솔직히 좀 의기양양해 있었죠. 전 제가 앞으로도 그렇게 운동하면서 그렇게 살 줄 알았어요.”

그동안 과거를 떠올려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거의 다 잊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기억의 페이지를 펼친 순간 기억들은 생생하게 날아올랐다. 오비완의 손과 겹쳐진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시니어 마지막 시즌, 결승전 전날 사고가 났어요. 깨어났을 땐 경기고 뭐고 다 끝난 후였죠. 누워있는데 의사가 오더니 앞으론 운동할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철심을 몇 개나 박았다고. 보실래요?”

오비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아나킨은 느릿하게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완전히 드러난 오른팔을 오비완 쪽으로 내보였다. 두껍고 울퉁불퉁한 흉터가 어깨 바로 아래에서부터 팔꿈치 아래쪽까지 종횡무진 뻗어 있었다. 흉터의 크기도, 모양새도 참혹했다. 팔꿈치 부근은 아예 다른 부분과 피부색이 달랐다.

“살만해요. 이 정도면 기적적으로 회복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전보다 감각이 좀 둔해지고 습한 날 좀 쑤시는 것만 빼면 괜찮은 편이죠. 팔을 절단할 뻔했다는데.”

"아팠겠구나."

오비완은 아나킨의 흉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더 아픈 사람의 표정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흉터에 손을 뻗었다. 흉터를 만져보는 손짓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오비완을 바라보며 아나킨은 아까부터 울렁이던 마음이 더욱 갑갑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수런거리고 온몸이 저릿했다. 문득 목이 말랐다. 첫사랑을 하던 풋내기 소년처럼 한 가지 충동이 아나킨의 몸을 지배했다. 저 사람을 가지고 싶다고. 아나킨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흉터에 집중하고 있던 오비완의 턱을 천천히 당겨 들었다. 순순히 딸려온 오비완의 푸른 눈에 아나킨의 얼굴이 가득 찼다. 오비완의 눈동자에 반사된 아나킨의 얼굴은 무언가를 잔뜩 참고 있는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나킨은 잠깐 멈췄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빗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길고도 짧은 순간 후 살짝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아나킨은 내내 한순간도 오비완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건 오비완도 마찬가지였다. 떨리던 오비완의 눈이 마치 애원하는 것 같은 아나킨의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흔들림을 멈췄다, 오비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나킨은 한 번 더, 깊게 오비완의 숨을 들이마셨다.

 

❖ ❖ ❖

 

다음날 오비완이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비는 이미 그쳐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아나킨이 있었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던 것도 아니면서 오비완은 굳이 침대 이불을 들어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곧 오비완은 아나킨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을 싸 들고 도망치듯이 자신의 방에서 벗어났다.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나서야 오비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오비완 케노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지난밤은 분위기에 홀린 것이 분명했다. 빗소리가 다정하고 아나킨의 상처가 안타까워서. 거실의 희미한 조명에 비친 아나킨의 속눈썹이 예쁘고, 그 아래 이글대는 눈동자가 아름다워서. 그래서.

지난밤을 떠올린 오비완은 얼굴을 조금 붉히고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만 떠올라 한심했다. 이러려고 아나킨을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정말,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아이를 돕고 싶었던 것인데 결과만 보자면 길 잃은 어린애를 꾀어서 잡아먹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엄밀히 따지자면 잡아먹힌 쪽은 사실 오비완이긴 했지만, 오비완은 자신의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 따른 위계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양심적이며 상식적인 정상인이었다. 평소에 가장 혐오하던 부류의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오비완은 그냥 욕실 벽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비완은 일단 몸에 밴 습관대로 기계처럼 씻으며 간신히 머릿속을 비웠다. 그때 밖에서 오비완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비완?”

살짝 잠긴 목소리가 더 매력적인 생각을 하다가 오비완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반성도 못 하고 또 무슨 생각이야.’

오비완이 대답이 없자 아나킨은 다시 한번 오비완을 불렀다. 아침부터 예감한 사실이지만, 이 좁은 집에서는 아나킨을 피하려 해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오비완은 심호흡하며 문을 열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한 아나킨은 오비완을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었다. 그 티 없는 웃음이 눈부셔서 오비완은 아까보다 조금 더 죽고 싶어졌다. 저렇게 어린애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서 가장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잘 잤어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아나킨은 친밀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오비완의 뺨에 얼굴을 가까이 붙여왔다. 오비완은 살짝 고개를 뒤로 빼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조금 상처받은 것 같은 아나킨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오비완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하필 어제는 금요일이었고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아나킨이나 오비완이나 이 도시에 주말에 만날만한 친구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라, 이 말은 오늘은 둘 다 얌전히 집에만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나킨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오비완은 할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서재에 틀어박혔다. 당연하게도, 아나킨은 서재 문 앞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오비완~ 점심 안 먹어요?”

“미안하구나, 배가 안 고파서.”

“정말 아무것도 안 먹어요?”

“먼저 먹고 있으렴.”

“진짜요? 오비완이 좋아하는 거 만들었는데, 저만 먹어요?”

이런 대화가 서너 번 오가는 동안 오비완은 서재 안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어제의 일을 하룻밤 실수일 뿐이고 아나킨의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넘어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비완 역시, 아나킨을 처음 본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삼십여 년 동안 쌓아온 윤리관이며 가치관은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심란했다. 하지만 계속 아나킨을 피하는 것도 상처를 줄 뿐이었다. 이 정도면 오비완이 아나킨을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것을 바보라도 알았을 것이다. 오비완은 애꿎은 머리카락만 오백 번째 쥐어뜯었다.

그때 서재 문에서 쾅, 소리가 나며 문이 흔들렸다.

“오비완, 이야기 좀 해요.”

낮고 거칠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낯설었다. 오비완은 한 번 입술을 깨물곤 문을 열었다. 아나킨이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각오하며. 하지만 오비완이 본 것은 주먹을 들고 서 있는 아나킨이 아니라 이마가 살짝 붉게 물든 아나킨이었다. 아나킨은 울적한 태도로 서서 오비완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오비완, 혹시 어제 싫었어요? 제가 억지로 밀어붙인 거예요?”

“그럴 리 있니. 그런 거 아니다.”

오비완은 당황해 일단 아나킨을 서재 안으로 잡아끌고는 아나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나킨은 얌전히 오비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붉게 물든 부분은 만져보니 살짝 부어오르기까지 해서 오비완은 기겁했다.

“이마는 또 왜 그러니. 설마 문에 들이박은 거야?”

“그럼 왜 자꾸 저를 피하세요? 아니면 제가 뭔가 실수했나요?”

“아냐 아나킨, 이건… 내 문제야.”

띄엄띄엄 대답하는 오비완의 혀가 무거웠다. 아나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비완을 바라보았다. 아나킨의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움이 역력했다. 그럼 왜…. 그렇게 말하려던 아나킨의 목소리보다, 오비완의 말이 빨랐다.

“미안하구나, 내가 네게 상처를 줬어.”

오비완의 말에서 완곡한 밀어냄을 느낀 아나킨이 저도 모르게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왜, 왜 사과를 해요?”

그리고 또 한 발. 무심코 아나킨을 피해 물러서던 오비완의 발이 의자 다리에 걸렸다. 뒤로 넘어가는 오비완을 아나킨이 잡아챘지만 무게 중심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둘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잠깐의 시간 후, 오비완은 젖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나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과할 거면서, 어제는 왜 그랬어요?”

아나킨의 두 팔 사이에서, 더 피할 곳도 없는 이곳에서 오비완은 막다른 길로 몰린 기분이었다. 아나킨은 오비완이 무엇이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오비완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솔직하지 않을 것 같았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나킨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지금의 침묵이 아나킨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비완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기어코 뜨거운 물방울 하나가 오비완의 뺨으로 떨어졌다. 물방울은 빠르게 식으며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럼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오비완, 제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오비완은 입을 열지 못했다. 아나킨의 눈에 드리운 그늘이 오비완의 폐부를 깊숙이 찔러, 숨이 막혔다. 저런 표정을 보기 위해 저 아이를 차에 태운 것은 아니었는데. 늘 바쁘게 움직이던 머릿속에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깨질 것 같은 위태로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점점 멀어지는 아나킨을, 오비완은 붙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아나킨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니.”

간신히 목구멍으로 새어 나온 그 한마디 말로 충분했다. 아나킨은 오비완을 숨 막히도록 강하게 끌어안았다.

 

 

4.

그렇게, 연애가 시작되었다. 아나킨은 꽤 괜찮은 연인이었다. 다정했고, 열정적이었다. 가끔 오비완 자신이 인간말종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 것만 빼면 거의 완벽할 정도였다. 이 점은 아나킨이 그가 가르치고 있는 제자들과 나이가 비슷한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오비완이 마냥 자괴감에 휩싸이기에는 아나킨의 얼굴이 가지는 파괴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오비완은 자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아나킨의 치댐을 받아주곤 했다.

 

완연히 여름으로 접어든 주말의 햇살은 밝고 따뜻했다. 오비완은 지친 얼굴로 떨어져 나갔다. 완전히 나른해진 오비완과 다르게 아나킨은 여전히 기력이 넘쳐서 오비완의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었다.

“설마 여기서 더 할 생각은 아니겠지?”

오비완의 말에 아나킨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눈을 빛내자 오비완은 약간 오싹해져서 두 손으로 아나킨의 얼굴을 쭉 밀었다.

“내가 너처럼 한참 때인 줄 아니, 떨어지거라.”

아나킨은 약간 삐죽한 얼굴로 옆으로 굴러 오비완에게 떨어졌다. 연하의 애인이 반 정도는 진심으로 삐진 것을 알면서도 오비완은 감당할 자신이 없어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벗은 발등에 닿은 햇살이 부드러웠고, 연인의 숨소리는 사랑스러웠다.

“오비완, 제가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요.”

느닷없는 말에 가만히 숨을 고르던 오비완은 눈만 굴려 아나킨을 바라보았다. 엎드려 있다 상체만 일으켜 턱을 괸 아나킨은 오비완을 내려다보았다.

“오비완에게 메시지 전해달래요. 전에 이야기했던 정규교사 전환 건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 기대한다고요.”

“아, 그거 말이니.”

오비완은 대수롭지 않게 듣더니 그냥 몸을 한 번 뒤척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난번엔 옆 동네 고등학교에서 우편으로 비슷한 내용 보내지 않았어요?”

아나킨은 포기하지 않고 오비완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 아니에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왜 다 거절해요? 다들 오비완이 자기 학교로 와 주기를 바라는 눈치던데. 지난번에는 메일로도 여러 통 오지 않았어요?”

“글쎄다.”

“아, 오비완!”

오비완은 팔을 뻗더니 막 성을 내려던 아나킨의 목을 휘감았다.

“아나킨, 잠 좀 자자 제발.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중에.”

오비완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잔뜩 묻어있어서 마지막 단어는 거의 잠꼬대처럼 들렸다.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이 없으신 건가. 오비완, 진짜 자요? 오비완?”

아나킨의 채근에도 오비완은 대답이 없었고 잠든 오비완의 얼굴을 구경하던 아나킨도 곧 졸음이 몰려와 오비완을 끌어안고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어떤 날은 딱히 목적지 없이 드라이브했다. 아나킨은 차를 좋아했고 운전도 잘했지만, 오비완은 아나킨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 편이었는데 대체로 오늘 같은 이유에서였다.

“아나킨! 당장 속도 줄이지 못해?!”

“에이, 오비완도 재밌으면서요. 이 정도는 몰아야 스릴을 즐긴다고 할 수 있죠!”

“이번 달에도 딱지 날아오면 네 사장님에게 받아낼 줄 알으아아악!”

거의 드리프트에 가까운 커브에 오비완은 조수석 위쪽에 달린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흔치않게 이성을 잃은 오비완의 모습에 아나킨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세워! 아나킨!”

“지금이요? 앗, 오비완 꽉 잡아요!”

“으아악!”

 

시내에서는 난장을 피워대고서는 정작 도로도 훨씬 평탄하고 운전하기 수월한 외곽도로로 나오자 아나킨은 안정적으로 차를 몰았다. 운전대를 뺏기려나? 흘끔 눈치를 보자 오비완은 포기했는지 창문을 열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에서 벗어나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저 너머로 보이는 산맥과 황량한 들판, 드문드문 보이는 농가의 사이를 메우는 건 희미한 바람 소리와 차가 달려가는 소리밖에 없었다. 아나킨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차를 운전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도로는 서쪽으로 뻗어 있었고, 그들의 앞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처럼 저물어가는 황혼의 빛은 처연했다. 아나킨은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Sleeping by your side like the old times

But it's better for me

If I set you free to decide

Either way, we're gonna be alright, alright.

 

아나킨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잘 부르는구나.”

“웬일이에요. 순순히 칭찬을 다 하시고.”

오비완은 콧방귀를 끼는 것으로 응수했다. 아나킨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운전대 너머로 시선을 고정했다. 절정 부분을 지난 노래는 이제 후렴부분을 반복하고 있었다. 가만히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가, 아나킨을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때, 밴드도 잠깐 했어요. 사고 이후론 그것도 끝이었지만.”

어둡게 붉은 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희미하고 연약한 반짝임을 보며 아나킨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이야기들이 가슴 속에서 수런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이야기들은 너무 오랫동안 들어줄 사람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다. 옆자리에서 오비완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 사람에게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아나킨은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그 사고로 엄마가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시선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아마 이런 감각일 것이다. 아나킨은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무서울 정도로 조용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오비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아나킨의 등을 밀어주었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엄마랑 단둘이 살았어요. 그래서 늘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하셨죠. 항상 바쁘셨어요. 그래도 제가 중요한 경기를 뛰는 날이면 꼭 보러 오셨어요. 한 달에 한 번, 일이 일찍 끝나는 금요일엔 외식하러 갔고, 주말엔 늘 장을 보러 동네에서 제일 큰 마트까지 같이 갔어요. 그날도 장을 보러 갔다가…”

아나킨은 잠깐 말을 멈췄다. 마지막 말 한마디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왜 사람은 가장 비참한 것을 떠올릴 때조차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는가. 오비완이 격려하듯 아나킨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나킨은 그제야 언제부터 참고 있었는지 모를 숨을 몰아 내쉬었다. 아나킨은 웃는 것처럼 힘겹게 입술을 조금 끌어올렸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학교도 한 달은 못 나갔고요. 졸업도 못 할 뻔했다니까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이 싫어 괜히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래도 도와주시는 어른들이 많아서 무사히 졸업했어요. 대학도 그럭저럭 가고 싶은 다른 곳을 찾았고요. 다들 점점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오비완, 그거 아세요?”

아나킨은 잠깐 고개를 돌려 오비완의 눈을 바라봤다. 주어도 명확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하지만 한없이 희미해지는 빛은 오비완의 얼굴 윤곽을 지워냈고 아나킨은 하는 수 없이 이제 검붉은 금만 남아 있는 지평선을 다시 바라보았다.

“괜찮아지지 않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져야 하는데, 더 힘들었어요. 엄마와 살던 곳에 엄마가 없다는 게. 엄마를 아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동네에 엄마만 없다는 게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웠어요. 봄은 오는 데 여전히, 살얼음 낀 호수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언제 얼음이 녹을지 모르는데, 발밑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언젠간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거라며 걷고 있는 그런 기분.”

태양은 이제 완전히 모습을 감췄고 앞은 더 어두워졌다.

“처음엔 잠깐 여행이나 다녀올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돌아갈 때가 되니,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온 힘을 다해 핸들을 부여잡고 있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아나킨.”

“엄마가 안 계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아나킨은 오비완의 손이 자신의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세워보렴. 사고 나겠다.”

아나킨은 도로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웠다. 가로등도 없는 외곽도로엔 더 이상 차도 다니지 않았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의 헤드라이트 빛 말고는 아무런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오비완은 아나킨을 끌어안았다. 뻣뻣하게 끌려온 아나킨은 이내 천천히 무너져 오비완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뺨을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비완의 옷으로 스며들었다.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구나.”

아나킨은 천천히, 그러나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킨은 내내 도망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그리고 삶 그 자체에서. 산다는 것은 예기치 않게 누군가를 잃는 것이고,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오비완은 천천히 아나킨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다고도, 괜찮아질 거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아나킨은 그게 기꺼웠다.

 

5.

짧은 여름이 시작되었다. 아나킨은 하고 있던 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정비소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렸다. 아나킨 덕분에 잃었던 동네의 신뢰와 줄었던 수입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정비소의 사장은 아나킨을 아끼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보너스 명목으로 자잘한 용돈을 매번 쥐어주며 이 일을 계속해 볼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는 사장의 의도가 퍽 명확했다. 아나킨은 사장의 은근한 유혹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며 무시했지만, 동시에 오비완과 함께할 미래에 대하여 상상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딘가에 머물고 싶은 기분, 그리하여 누군가와 좀 더 단단하게 연결되고 싶으며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아나킨은 오비완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 많이 궁금해졌다. 오비완이 평범한 대리교사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눈치 챈 사실이었다. 일단 대리교사의 수입으로는 오비완이 입고 다니는 옷과 타고 다니는 차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나킨 자신처럼, 오비완도 어떤 과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나킨은 온갖 상상을 다 해보았다. 친척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있을까? (이 생각을 떠올리기 전날 아나킨은 추리 소설을 읽었다) 누군가와 이혼해서 위자료를 받았다던가? (떠올리자마자 기분이 나빠진 이 생각은 아나킨이 빠르게 삭제했다) 아니면 범죄와 관련 있다던가? (이건 조금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척 궁금했지만, 아나킨은 언젠가 오비완이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해줄 날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오비완이 이런 식으로 인내를 시험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늦게 들어간단다. 오늘 저녁은 먼저 먹으렴.]

오비완에게 온 문자 메시지를 닫으며 아나킨은 입을 삐쭉거렸다. 오늘도 오비완은 늦을 예정인 것 같았다. 오늘 아침부터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오기로 사 온 이인분의 요리 재료를 보니 더욱 심술이 솟아올라 아나킨은 장 봐온 것들을 냉장고에 거칠게 집어넣었다.

최근 들어 오비완은 종종 집에 늦게 올 때가 생겼다. 근처 고등학교에서 여름방학 동안 하는 무슨 과학캠프인가 하는 것의 지도 교사를 맡게 되면서 만난 학생들과 죽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오비완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 부아가 치밀어 올라 도대체 거기서 뭘 하냐고 물어보니 무슨 과학 이론이며 절반정도는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들이 줄줄 이어졌다. 어쨌든 이야기를 하는 내내 오비완은 퍽 즐거워보였다. 아나킨이 한 번 물어본 이후엔 묻지 않아도 가르치고 있는 것들이며 학생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많아져서 아나킨은 요즘 재미가 없었다.

 

지난번에는 그 중 한 명을 집에 데려오기까지 했다. 금발의 순해 보이는 인상이 약간 강아지를 닮은 소년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상과는 다르게 아나킨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은 강단 있었다.

“아나킨, 오늘은 일찍 들어왔구나. 이쪽은 루크란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지. 보여줄 게 있어서 데리고 왔어. 루크, 이쪽은 아니킨.”

오비완의 소개에 둘은 손을 가볍게 마주잡으며 인사했다. 서로의 눈에 뚜렷하게 ‘누구지? 이 사람은?’ 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오비완은 딱히 더 친분을 다지게 할 생각은 없는 듯 루크를 데리고 서재로 올라갔다. “저녁은 먼저 먹고 있으렴.” 이라는 말과 함께.

오비완과 루크가 서재에 올라가 있는 동안 아나킨은 저녁을 먹기는커녕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도대체 뭘 이렇게 길게 보여주고 있는가! 객과적인 시간 인지능력을 상실한 채 거실을 맴돌던 아나킨은 결국 슬금슬금 2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의 분은 방음이 잘 되어서 안쪽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나킨은 허리를 숙여 열쇠구멍에 귀를 바짝 가져다댔다.

“-님, 이건-”

“루-, --가 ---해서-”

두꺼운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 희미했고, 간신히 들리는 음절들은 너무 띄엄띄엄해서 거의 해독이 불가능했다. 아나킨은 더 애가 닳아 마치 문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문에 달라붙었다. 그 덕분에 너무 늦지 않게 한 가지를 들을 수 있었다. 문과 가까워지를 발소리! 아나킨은 후다닥 문에서 떨어져 간발의 차로 바깥쪽으로 열리는 문에 머리를 부딪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숨 막힐 것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나킨은 누가 보아도 엿듣고 있던 것 같은 포즈를 하고 있었고 하필 문을 연 것은 오비완도 아니고 루크였다.

“어, 그러니까. 아나킨씨…?”

루크의 뒤에서 상황을 파악한 오비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뭐 필요하신 게 있나 해서요. 아무래도 없으신 것 같네요. 그렇죠? 오비완 뭐 필요한 거 없죠? 전 그럼 이만 내려가 봅니다? 루크 편히 있다 가요. 오늘 반가웠어요!”

아나킨은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숨 한 번 쉬지 않고 말을 내뱉고는 혹시라도 누가 붙잡을 새라 후다닥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다행히 오비완과 루크는 아나킨을 붙잡지는 않았다. 오비완의 침실에 숨어 있자니 조금 후 루크가 집을 떠나는 소리와, 오비완이 루크를 배웅해주기 위해 함께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아나킨은 그날 오비완의 침대를 뒹굴며 이불을 발로 팡팡 차댔다. 그게 거의 2주 전의 일이었다.

 

❖ ❖ ❖

 

“아나킨,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늦는다고 미리 이야기도 했겠다, 별 생각 없이 늦은 시간에 돌아온 오비완은 식당에서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 있는 아나킨을 발견하곤 놀라서 물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오늘도 일하느라 늦으셨어요?”

“그렇지. 아이들이 호기심이 많더구나. 질문이 많았어. 곧 대회에서 토론 준비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오비완은 가방을 의자 위에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가지고 왔다. 아나킨의 맞은편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오비완은 슬쩍 아나킨의 안색을 살폈다. 번뜩이는 눈이며 삐죽대는 입매는 심각하다기 보다는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것에 가까워 일단은 마음이 놓였다.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리려나 보군.’

“…어린애들이랑 마음이 잘 맞으신가 봐요.”

그리고 마음 놓고 마시던 맥주를 입 밖으로 내뿜을 뻔 했다. 입에서 약간 새어나온 맥주를 소매로 닦으며 오비완은 얼떨떨한 얼굴로 한참 연하의 애인을 바라보았다. 턱을 괴고 벽의 무늬를 세고 있는 아나킨은 이제 대놓고 볼이 퉁퉁 부어있었다.

“아나킨,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질투하니?”

“아, 그럼 안돼요?!”

아나킨은 벌컥 성을 내며 일어섰다. 단단히 팔짱낀 팔과 다르게 얼굴은 살짝 붉었다. 그 표정을 보며 오비완은 ‘아니 정말? 미성년자인데?’ 등 생각 없이 입 밖으로 나갈 뻔 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목구멍 아래로 다시 집어넣었다.

“제가 그만큼…”

분위기를 잡고 내뱉으려던 아나킨의 일장연설은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끊겼다. 아나킨은 단단히 열 받는다는 표정으로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네가 가 볼게요.” 하곤 식당을 나섰다.

 

“교수님!”

문이 열리자마자 아나킨은 밝은 목소리로 교수님을 찾는 루크와 마주쳤다. 당장 현관문 안으로 달려들 것처럼 흥분한 표정이던 루크는 아나킨이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지 당황하며 얼어붙었다.

“어…. 아나킨씨? 오비완 교수님 계신가요?”

“계시긴 한데….”

그런데 교수님이라고? 아나킨이 잠깐 중얼거리는 사이. 아나킨을 따라 나온 오비완이 아나킨의 옆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루크? 이 시간에 여기엔 무슨 일이니?”

“아, 집에 가는 길에 서점 들렀다가 이걸 발견해서요!”

루크는 등에 매고 있던 가방에서 두께가 제법 되는 책을 꺼내 기쁜 표정으로 내밀었다. 아나킨이 보기엔 책보다는 수면제나 무기의 용도로 쓰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은 물체의 표지에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런….”

오비완은 바짝 붙어 서 있는 아나킨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의 소리로 이를 갈았다. 아나킨은 오비완을 대신해 책을 펼쳐보았다. 책의 뒤쪽, 저자 소개 페이지엔 몇 년 전의 오비완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오비완 선생님이 오비완 케노비 교수님이셨던 거죠? 제가 교수님이 쓴 책 좋아하는 거 아시면서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지난번에는 교수님 논문으로 토론까지 했는데요! 이 책은 지난번에도 논문 같이 썼던 플로 쿤 교수님과 연구하신건가요? 저 이 책 서점에서 발견하자마자 사버렸어요!”

루크는 기관총으로 연사하는 것처럼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흥분으로 들뜬 뺨은 붉었다. 오비완은 잠시 마른세수를 한 뒤 입을 열었다.

“좋아해줘서 고맙구나.”

루크는 현관에 그대로 선 채 한참을 오비완이 썼던 논문들이며 책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이야기하다가 기어이 들고 온 책에 오비완의 사인까지 받아냈다. 유명한 대학의 교수로 알려진 오비완이 왜 이렇게 작은 도시에서 전공과 전혀 관련도 없는 영미문학을 가르치고 있는지 루크는 궁금해 했으나 오비완은 교묘하게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루크는 밤이 늦어 숙모가 걱정하시겠다는 재촉에 등이 떠밀려 돌아갔다. 오비완은 루크가 돌아가기 전, 소문이 나면 귀찮아지니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내가 책에 사진 같은 거 넣지 말자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오비완이 낮게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뒤에 서서 그의 등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까 반쯤 투정에 가깝게 부렸던 질투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그저 당혹스러웠다. 아나킨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오비완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와 잠깐 멈춰있는 사람, 그리하여 정처 없는 현재를 떠돌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오비완의 과거에 대하여 수많은 상상을 했지만, 그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아나킨은 문득 오비완이 멀게 느껴졌다.

“오비완, 돌아갈 거예요?”

아나킨의 말에는 맥락이 없었다. 오비완은 계속 투덜거리던 것을 멈추고 아나킨을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냐, 가긴 어딜 가.”

“그냥요. 언젠가 돌아갈 거냐고요.”

“뜬금없이 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차라리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지 그러니, 그건 알아들을 수라도 있었지.” 무신경하게 말하며 돌아서는 오비완을 아나킨은 뒤에서 껴안았다. 오비완에게선 희미한 술 냄새와 함께 아나킨과 같은 향이 났다. 품에 꽉 들어차는 단단한 몸을 더 세게 안으며 아나킨은 고개를 숙여 오비완의 뺨에 뺨을 비볐다. 약간 꿈틀거리며 귀찮아하던 오비완은 한숨을 내쉬곤 몸에 힘을 풀었다.

“오비완은 왜 여기에 왔어요?”

“오늘 뭐 잘못 먹었니. 이상한 질문만 하는구나.”

“그렇다고 치고요.”

아나킨은 막무가내로 밀어 붙였다.

“글쎄다…. 널 만나려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나온 기력 없는 목소리가 평소처럼 성의 없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답지 않은 아부 말고요.”

“그럼 떠나고 싶어서?”

“아 진짜 뭐든 쉽게 이야기해주는 법이 없네요. 진짜.”

손바닥 뒤집듯 홀랑홀랑 말을 바꿔가며 대강 대답하는 오비완이 얄미워서 아나킨은 조금 억울한 마음으로 오비완의 귀를 깨물었다. 어느새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허무했던 마음은 어느 샌가 사라진 뒤였다. “아프다, 아나킨!” 오비완은 팔꿈치로 아나킨의 배를 가격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럼 그동안 오비완 이야기는 왜 안했어요?”

진심이 실린 오비완의 공격에 아나킨은 배를 감싸 쥐고 조금 낑낑대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무슨 이야기?”

“오비완 과거 이야기요. 전에 교수였다던가 그런 거요. 전 오비완한테 또 엄청난 과거가 있는 줄 알았잖아요.”

오비완은 아나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야, 네가 안 물어봐서…?”

아나킨은 잠깐 굳어 있다가 오비완에게 덤벼들었다. “오비완!” 장난스러운 소란함이 천천히 잦아드는 저녁이었다.

 

6.

아나킨이 낯익은 사람을 만난 것은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저녁이었다. 북쪽에 가까운 이 도시의 여름은 짧았고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저녁, 발걸음은 한없이 경쾌했다. 이번 달도 챙겨준 보너스 덕분에 지갑이 두둑해 한결 더 가볍기도 했다. 아나킨은 이번 달 월급으로 살 것을 미리 정해두었고 방금 그 물건을 막 사고 나온 참이었다.

“아나킨?”

그 때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기고 코 아래와 턱 주변에 짧은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웬만한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신장에 강렬한 눈빛이며 매부리코가 인상적이라 기억에서 쉬이 잊힐 유형이 아니었다. 아나킨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쳤다. 미식축구 경기장 관중석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관찰하던 남자.

“콰이곤?”

“날 기억하는 군.”

아나킨은 콰이곤이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제 코치님이 되실 뻔 했으니까요. 사고 때도 마지막까지 와 주셨다고요. 대학교 추천장도 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감사인사도 못했네요.”

“사고는 정말 안타까웠네. 자네는 내가 지금까지 선발했던 선수 중에 최고였는데 말이지.”

콰이곤은 아직도 미련이 남는 듯 아나킨의 팔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아나킨을 아는 친구들은 모두 한 번씩은 그런 말을 했다. 영영 잃어버린 것을 직시할 때, 어쩔 수 없이 놓쳐버린 것의 가치가 새삼스레 사무칠 때, 그것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던 시절도 있었다. 아나킨은 씁쓸하게 웃으며 팔꿈치를 감싸 쥐었다.

“오래 전 일이니까요. 괜찮습니다.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도 없고요.”

이 말이 거짓말이던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아나킨은 이번 달 월급과 교환한 물건을 떠올리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비완에 대해서 생각해서 그런지 콰이곤의 옆으로 익숙한 차가 보였다.

"오비완?"

다시 보니, 차량번호까지 그가 아는 차가 맞았다. 아나킨의 말에 콰이곤도 뒤를 돌아보았다. 오비완도 그들을 발견했는지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아나킨? 콰이곤?"

"오비완? 자네가 왜…."

"두 분 아는 사이세요?"

당혹감이 섞인 침묵 속에서 셋은 서로서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오비완이었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 ❖ ❖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막 나온 음료를 두 손으로 잡으며 아나킨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맞은편에 앉은 콰이곤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우연은 아니라네. 이 지역 고등학교 경기 영상을 체크하다가 영상에 찍힌 자네의 얼굴을 봤어.”

아나킨은 루크의 경기를 몇 번 보러 갔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의 어색했던 만남 이후로도 아나킨은 루크를 만날 일이 종종 생겼고, 날카로웠던 첫인상과 다르게 서로 죽이 꽤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루크도 학교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뛴다기에 일이 없을 땐 경기를 보러 가곤 했는데 그 때 찍혔던 모양이었다. 아나킨이 관중석에 앉아 있어도 찍고 싶어지는 얼굴이기는 했다.

“자네와 함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오비완.”

아나킨의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오비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여기서 콰이곤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요. 일 때문에 오셨나요?”

“반쯤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나? 어째 요새 연락이 통 안 된다 싶긴 했는데.”

“저희가 뭐 자주 연락하는 사이였나요. 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좀 지쳐서요. 마냥 쉬기엔 좀 심심해져서 애들도 가르치고.”

“잠깐만요!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신데요?”

아나킨이 견디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오비완과 콰이곤이 주고받는 대화는 격의없이 친밀하게 들렸다. 누구에게나 적당히 예의바르게 선을 긋는 오비완이 자신 말고 이렇게 시큰둥하게, 즉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처음 본 아나킨은 가벼운 충격에 빠졌다.

“선후배 사이지.” “어릴 때부터 쭉.” “거의 내가 키웠다고 생각하면 된다네.” “아, 그건 아니고요.” 콰이곤의 마지막 농담에 오비완은 정색했다. 어릴 때부터 당신이 치고 다니던 사고를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는 투덜거림에 콰이곤은 웃지도 않고 네가 너무 걱정이 많았던 것이라는 말로 응수했다. 둘은 한동안 아나킨이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잠자코 대화를 듣는 아나킨의 심장이. 바닥 모를 어딘가로 추락했다. 바로 옆에서 콰이곤을 구박하는 오비완의 목소리가 아득했고 아나킨은 오비완이 문득 낯설었다. 루크 덕에 오비완의 과거를 처음 알았던 그 날처럼, 아니 그 날보다 더. 돌아갈 곳이 있고 찾아올 사람이 있는 오비완이 무서웠다.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어느 날 낯선 곳에서 눈을 떴을 때 그를 두고 먼 곳으로 떠나있던 어머니처럼. 오비완도 그렇게 될까.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저녁은 아침이 되면 꺼지는 가로등 불빛처럼 흔적 없이 스러질까. 아직 오지 않은 상실이 성급하게 아나킨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콰이곤의 말을 조금 놓쳤다.

“…좋아보여 많이 걱정은 하지 않았네만 그래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더군. 자네의 친구들도 자네의 안부를 궁금해 해.”

콰이곤은 몇 사람인가 아나킨의 고향 친구들 이름을 댔다. “가끔 만날 때마다 자네 이야기를 한다네.” 그리운 이름이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소식이 끊겼으니 걱정할 만 했다. 이유 모를 미안함에 고개를 숙인 아나킨을 보여 콰이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아나킨은 무의식적으로 오비완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오비완의 얼굴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조용했다. 아나킨은 그게 다시 못내 서럽고 불안해 말이 날카로워졌다.

“…안갑니다.”

“자네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방황이 길지 않았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겠어. 다시 삶을 시작해야지.”

삶. 아나킨의 숨이 턱 막혀왔다. 그가 더 이상 어머니가 없는 집에 두고 왔던 것들이. 내내 낯선 장소와 낯선 길을 헤매며 따돌렸던 것들이 단숨에 아나킨을 따라잡아 발목을 잡아챘다. 혼란스러운 아나킨의 얼굴을 보며 콰이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강요하려고 한 건 아니네. 내게 그럴 자격도 없고. 하지만 아나킨. 생각해보면 좋겠군. 자네는 아직 젊고 남은 삶은 길어. 언제까지 무너져있기엔 아깝지 않나.”

콰이곤은 망가져버린 아나킨의 팔을 볼 때와 같은 눈빛으로 아나킨을 보았다.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으로.

 

오비완과 짧은 작별인사를 나눈 후, 콰이곤은 돌아갔다. 해는 이미 지고, 어두워진 도로를 드문드문 도시의 불빛만이 비추고 있었다. 오비완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나킨은 내내 말이 없었다. 오비완도 생각에 잠긴 아나킨을 방해하지 않아 그들의 귀갓길은 적막했다. 집에 도착해서, 아나킨은 습관적으로 부엌에 먼저 들어가려고 했다. 오비완은 그런 아나킨을 말렸다.

“아나킨, 오늘은 배달이라도 시켜 먹는 게 어떨까?”

그렇게 말하는 오비완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태연하고 평온했다. 언제나 흔들리는 건 내 몫이지. 아나키는 그게 얄미워 별안간 오비완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아나킨 잠, 깐만.” 너무 격렬한 입맞춤에 오비완은 아나킨을 달래어 보려고 했지만 그 몸짓마저 얄미워서 아나킨은 더 집요하게 오비완의 입 안을 훑고 입술을 깨물었다. 좀 천천히 하자며 아나킨의 가슴을 밀어내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오비완의 무릎이 풀릴 때까지.

어느새 소파에 앉은 아나킨의 무릎 위에 올라탄 오비완은 간신히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아나킨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아나킨, 얘기 좀 하자꾸나.”

오비완은 셔츠 아래로 슬금슬금 파고드는 손을 붙잡아 떨어트렸다. 아나킨은 못들은 척하며 오비완의 귓바퀴에 짧게 입을 맞추다가 귓불을 가볍게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비완은 작게 읏, 하는 신음을 흘렸다. “아나킨!” 결국 오비완이 아나킨의 턱을 쭉 밀어내고 나서야 아나킨은 오비완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전 이야기하기 싫어요.” 아나킨은 완고하게 오비완의 눈을 피했다.

“그건 네가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오비완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아나킨은 이를 악물었다. 오비완의 말이 맞았다. 답은 알고 있었다. 콰이곤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오비완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때보다 한참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어중간한 이 시간을 지속할 수는 없다고. 다시 한 번 시작해야 한다고, 아니 시작하고 싶다고. 오래 주저앉아 있었다. 긴 시간 도망 다니고 있었다. 이제야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앞의 사람이 그런 마음을 들게 만들었다.

“오비완은 그렇게 제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더, 아나킨은 오비완에게 물었다. 오래 전 그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답을 알면서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어리광이었다.

“아나킨,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오비완은 아나킨의 고수머리를 가볍게 넘겨주며 고요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집을 떠난 건 예기치 못한 이별 때문이었지. 어떤 이별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니까. 그러니 이번엔 온전히 네가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오비완의 말이 초여름 내리는 비처럼 아나킨의 마음을 두드렸다. 심장에서 시작된 온기는 눈가까지 금세 번져 눈이 시큰했다.

“그리고 실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고 있지?”

이번에도 정곡이었다. 딱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남은 불안 하나가 울컥하고 언어가 되어 튀어나왔다.
“그치만 헤어지기 싫어요.”

오비완은 기어코 넘쳐흐른 아나킨의 눈물을 손으로 문질렀다.

“누가 보면 헤어지자고 한 줄 알겠구나.”

“그게 그거잖아요. 여기서 제가 사는 동네까진 차로 20시간도 넘게 걸려요. 그리고 오비완, 오비완도 돌아갈 거잖아요 이제.”

“그건 그렇지. 안식년에 몇 년 치 휴가와 휴직도 다 몰아 썼으니. 하지만 아나킨, 우린 길에서 만났잖니. 길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겹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갈라지잖아.” 갈라진다는 말에 아나킨이 울컥하며 오비완의 손목을 잡았다. 오비완이 부드럽게 아나킨의 손을 토닥였다.

"그러니, 언젠간 또다시 만날 거라는 것도 믿도록 하자. 네가 나에게 돌아올 운명이라면, 넌 분명히 그렇게 할 테니까."

 

❖ ❖ ❖

 

아나킨은 다음날 새벽 문을 나섰다. 등에 맨 것은 처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와 같은 가방 하나였다. 부러 배웅하지 않고 거실 창으로 멀어지는 아나킨의 등을 바라보며 오비완은 손에 든 반지를 오래도록 굴렸다.

"반지에요. 이렇게 드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요."

아나킨이 약간 부은 눈으로 오비완에게 내민 것이었다. 완전히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건 그 약속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단단했다. 내도록 만진 반지는 온기가 돌아 따뜻했다. 단단한 금속이 주는 온기를 만지작거리며 오비완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남은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 떠올렸다.

아주 먼 과거의 일들은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느껴진다. 선명하게 장면과 장면들이 떠올라도 실감이 없어 영화 속의 장면이나 책 속의 장면들과 구분되지 않곤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겪지 않은 풍경들과 듣지 못한 말들이 기억의 조각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오비완은 별 위화감 없이 받아들였다. 나의 기억이지만 나를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들. 흥미로운 연구주제를 대하는 정도의 관심으로 기억을 더듬어보는 정도였다. 드문드문 과거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그 때와는 다른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도 딱 흥미롭군, 그 정도.

하지만 단 한 명. 아직 오비완의 삶 속으로 찾아오지 않은 그 아이에 대한 기억만큼은 버거울 때가 있었다. 연속적이지도, 순차적이지도 떠오르는 기억의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그 아이. 어린 시절부터 다 자란 후까지 골고루도 등장하는 그 아이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은 화염 속에서 증오와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던 얼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 표정이 묘하게 울 것 같아서 오비완은 까닭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언젠가는 이 아이를 만나게 될까. 겪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만남이 쌓여가며 오비완은 삶의 어느 순간, 아나킨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용암과 화염 속에서 그를 향해 증오한다고 외치던 그 아이는 이 삶에서 자신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까. 호의? 적의? 또는 무관심? 오비완은 문득 두려웠지만 정확히 무엇이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운명처럼 아나킨을 만났다. 불타오르듯이 붉은 석양이 검은 산과 검은 도로를 물들이던 그 저녁에. 오비완이 아나킨을 알아보았을 때, 아나킨은 오비완을 보며 웃었다. 순수하게 호의 어린 웃음, 그 웃음에 그동안의 세상이 부서졌다.

오비완은 그에게 속절없이 이끌렸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연인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지만 아나킨이 어떤 관계를 원했더라도 오비완은 결국은 그에 응했을 것이다. 사실 오비완은 이제는 아나킨에게 No,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오비완은 아나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네가 나에게 돌아올 운명이라면, 넌 분명히 그럴 테지.

 

아나킨의 뒷모습은 완전히 멀어져 이제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7.

오비완이 한낮의 태양이 환하게 내려쬐는 도로가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문득 떠오르는 추억에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오비완에게 가져온 변화가 있다면 이럴 때 베푸는 작은 친절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뜨거웠고 공기가 더웠다. 오비완은 서서히 차의 속력을 줄였다. 가까운 도시까지 태워줄 생각이었다.

차의 속력이 줄어들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사람과의 거리가 줄어들며 오비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가까워지고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어쩐지 익숙했다. 차가 완전히 섰을 때, 지나치게 잘생긴 그 청년은 오비완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오비완, 여기 잘생긴 청년 태워갈 생각 없어요?"

 

If you're meant to come back to me, you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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