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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점심이 한참 지났으나 오비완은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그는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해 끝까지 쉬지 않고 모두 읽었고, 그 후엔 밖에 비가 내리는데도 베란다에 마련해둔 화단에 물을 줬다. 오늘은 그러기로 다짐한 날이었으니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먹구름 때문에 해가 떨어져 저녁이 됐는지 아니면 아직 노을이 지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그저 태양이 구름 속에 숨어있는 것뿐인지, 그 무엇도 분별할 수 없었다. 거실 창의 커튼을 모두 걷어두었는데도 그랬다. 하루가 길다고 느껴진 이유가, 그래서인 것 같았다. 그러자 초인종이 울렸다. 찌르르, 짧게 울렸다가, 곧, 찌르르르르르르, 길게 울렸다. 오비완은 누가 찾아올 사람이 있나 짧게 회상했지만 아무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낯선 사람의 방문을 꺼리는 사람이었다. 창문 커튼을 모두 걷어두었으나 그는 창가 쪽으로 가지 않았고 집은 오래전부터 희미한 어둠에 익숙해진 채 작은 등불 하나 켜두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문을 열었다.
아나킨이었다. 오비완은 이 청년이 비에 홀짝 젖은 모습을 언젠가 본 적 있는 것만 같다 생각했다. 다음으로 수건을 떠올렸지만, 아나킨을 홀로 현관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의 곁을 한시라도 떠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아나킨.”
“오비완.”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짧게 인사를 나눴다. 아나킨은 떨고 있었다. 오비완은 그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들어오겠니? 오비완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이 콱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장면을 분명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겪은 적이 있었다? 아니, 본 적이 있었다. 그 이상한 사실 하나를 깨닫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오비완이 아무말 없자, 아나킨이 먼저 신발을 벗고 오비완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말을 꺼내지 못하게 된 오비완은 아나킨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집 안으로, 방 안으로 이끌었다. 말 대신 행동으로, 오비완은 수건이 있는 욕실 서랍장까지 아나킨을 데려가 수건을 꺼내 건네주었고 다시 그를 데리고 부엌으로 가 언제나 혼자서 사용하는 작은 테이블 앞에 그를 앉히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랬던 것만 같았다.
“제가 한 모든 일을 당신께 말씀드리면 제게서 멀어지실 건가요?”
그게 첫 마디였다. 오래된 먼지처럼 조용히 쌓여가던 침묵으로 바람을 불어 넣은 아나킨의 첫마디. 오비완은 그 문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언제나 오비완이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오비완은 아주 편한 홈웨어를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순면의 연약한 복장, 더러운 것이라곤 전혀 모른다는 듯이. 오비완은, 비에 젖은 채 작은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아나킨에게로 갔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를 자신에게로 조금 돌려 앉혔다. 그는 순순히 몸을 움직이는 청년을 안아주었다. 상아 빛의 파자마는 금세 축축해졌다. 오비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아나킨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라고 할 것도 없었던 그들에겐 계속해서 대화가 없었다.
남자가 포옹을 풀고 조금 뒤로 물러서자 품 안의 청년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건네준 수건은 이미 빗물을 닦아 젖어버렸음에도, 아나킨의 뺨 또한 여전히 촉촉이 젖어 있었다. 오비완은 청년의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울었니?”
이것이 오비완의 첫마디. 그는 그 한마디 말문을 트기가 버거웠다. 그럼에도 첫 말문을 연 이유는 아나킨이 걱정되어서, 그뿐이었다.
다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아나킨은 앉아 있던 작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오비완이 그를 조금 올려보아야 할 정도가 됐다.
비는 계속 내리는데, 그들은 키스했다. 아마 아나킨이 먼저였을 것이다. 아나킨의 뺨을, 그 젖은 뺨을 먼저 쓰다듬고 품어낸 이는 오비완이었으나, 먼저 입술을 앞세워 온기를 찾아나선 이는 아나킨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첫키스였다. 그들은 아무 언질도 없이 그렇게 키스했다.
‘첫키스일까?’ 오비완은 문득 생각했다. 과연 첫키스가 맞을까? 그는 언젠가 머나먼 시간 저편에서 키스하고 사랑했다. 오비완만 아는 사실이었다. 오늘까지만 하더라도, 그 사실은 오비완만의 착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오랜 시간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런데 아나킨의 질문 한 번으로 그 일은 실제가 되었다.
오비완은 궁금했다. 아나킨이 말한 ‘제가 한 모든 일’은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 그 사소하지만, 오비완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한 가지가, 오비완 케노비는 너무도 궁금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천둥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
끔찍한 하루가 될 것이다. 오비완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이미 두 번 헛구역질했고, 속은 더이상 울렁거릴 수 없을 정도로 울렁거렸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여전히 없었다. 속은 더욱 엉망으로 뒤집혔다. 예민한 위장을 타고난 자신을 탓할 수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라고 오비완은 생각했다. 그는 정말 오랜만에 아주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난 참이었다. 마음이 편해지고 아무 걱정도 없는 꿈.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함께 있고 싶었던 사람과 얼마든지 함께 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의 꿈이었다. 그 행복에 겨운 꿈을 너무도 길게 깊이 꾼 탓에 몸이 찌뿌둥해지긴 했으나…….
오비완은 이 끔찍한 구토감을 제시간에 갈무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거의 기다시피 침실로 돌아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가 전화할 곳은 단 한 곳이었다. 신호음이 정확히 두 번 울린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장님, 제가…….”
- 또 속이 말썽이야? 알겠네. 점심쯤 온다고 말하려 했지?
오비완은 겨우 몸을 움직여 바닥에 앉은 채 침대에 등을 기댔다.
“잘도 아시네요.”
- 자네를 안지 벌써 10년은 됐다네. 건강 잘 챙기고 점심때 보자고.
“서장님께서 그렇게 물렁거려야 되겠어요? 당신은 그게 문제입니다, 콰이곤.”
휴대전화 너머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더 좋은 자리 마다하고 계속 내 밑에 남은 건 자네니까 불평 말라고, 오비완.
“알겠어요. 금방 출근하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리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오비완은 잠시라도 더 눈을 붙일까 고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이 나아지리란 보장은 없었다. 오늘 하루는 이 거북함을 안고 가야하리라. 밤늦게 잠복근무를 하려던 계획을 누군가에게 넘겨야 할까? 오비완은 걱정했으나,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굳이 넘길 필요는 없으리라. 그는 찬물로 샤워하기로 했다.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쨌든 점심쯤엔 꼭 출근하고 싶으니,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몸이 힘들 때 바짝 힘들면 되는 것. 그는 휴대전화를 다시 침대 위로 던져두고 네발로 기어 욕실로 향했다. 침실이 보이는 거리면서도 꽤 걸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욕실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올 것을 조금 후회했다. 음악이라도 틀어두면 덜 허전할 텐데. 그때 띠링, 하는 알람이 들려왔다. 오비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다시 띠링.
“하…….”
그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때 다시 띠링, 문자가 왔고, 그는 욕실로 와나전히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알람음이 들리지 않게끔 샤워기를 먼저 틀었고 제발 문자가 그만 오길 바랐다.
아주 늦은 모닝커피를 사러 카페에 들르니 카페 주인은 속이 안 좋을 때는 따뜻한 허브티가 좋다며 반강제로 주문을 바꿔버렸다. 단골손님에게만 부리는 오지랖인지라 오비완도 부러 거절하지 못하고 따뜻한 텀블러를 받아들었다. 오비완은 따뜻한 티를 마시다 혀를 데였다. 평소 훨씬 더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데도 그랬다. 점심을 먹으러 사람이 빠져 경찰서에는 순경 몇 명만 돌아다녔다.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일에만 빠져 찌푸려져 있던 인상들이 일순간 펴지며 반가운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오비완은 점심쯤 출근하는 일의 유일한 장점이 이 순간이라고 언제나 생각했다.
“오비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뭐부터 들으실래요?”
자신의 자리에 앉아 가방을 풀려던 오비완은 잠시 멈칫했다. 순경 제임스는 언제나 이런 방식의 대화를 즐겼다. 컨디션이 저조한 오비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오비완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결과는 쉽게 나왔다.
“좋은 소식 먼저 부탁하죠.”
“무슨 일이십니까? 항상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은 상대적이며 좋고 나쁨은 나누는 버릇은 마음의 평화를 불러오지 못한다고 연설하실 땐 언제고?”
제임스는 소식을 전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장난을 이어가고 싶어 보였다. 그러나 오비완에게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오늘같이 좋은 꿈을 꿨음에도 속이 뒤집히는 날 하루 정도는 그 다짐을 지키기 어려워지기 마련이었다.
“소식을 전하려는 본래 목적을 잊은 건 아니겠죠, 제임스 순경?”
그제야 제임스는 오비완 형사의 눈치를 살폈다. 정도를 알아야할 때였다.
“좋은 소식이요, 예……. 저 그게…….”
뜸을 들이는 목소리만 듣고도 또 시답잖은 농담을 하려 했던 게 분명했다. 오비완은 크게 한숨을 쉬고 텀블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또다시 허브티에 혀를 데었다. 그렇게 뜨겁지도 않았는데.
“그 녀석이 또 왔네요.”
그럼 전 이만, 이라는 말을 남기고 제임스 순경은 꽁무니 빠질세라 사라졌다. 단번에 일그러진 오비완의 얼굴을 본 게 분명했다. 오비완은 정리하던 가방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당연하다는 듯 오비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매슥거리는 속을 달래려고 위 부근은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듯 문지르며 걸었다. 그가 가야 하는 곳은 단 한 곳이었다. ‘그 녀석’이 있는 곳.
몇 걸음 걷지 않아도 금방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른 오후부터 이곳으로 오는 유형은 딱 두 가지였다. 변태거나, 소매치기.
“실력이 녹슬었니?”
오비완은 벽에 기대서며 물었다. 이름을 부르는 일도 수고스럽다는 듯. 얇은 쇠창살 사이로 브루넷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오셨네요? 저 여기 3시간이 넘게 갇혀있었다고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바빴어.”
“요즘 큰 사건도 없잖아요. 수사 지휘 맞으신 사건도 없잖아요.”
“바쁘다면 바쁜 줄 알렴, 아나킨.”
그러자 청년은 이를 보이며 밝게 웃었다. 잘하는 일이라곤 웃는 일뿐인 사람처럼 지나치게 행복해 보이는 미소여서 오비완은 오히려 한숨이 나왔다. 딱딱한 데다 더럽기까지 한 나무 의자에 앉아 3시간 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나킨이 소매치기로 잡혀 온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나킨은 끝내주게 솜씨가 좋은 소매치기였으니까. 일부러 잡혀 온 게 분명하다 보니 오비완은 그 이유를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왜 잡혀 왔다고 안 물어보세요?”
“왜, 왜, 굳이.”
“당신 보고 싶어서요.”
오비완은 벽에 기댄 몸을 가볍게 떼어내며 혀를 내밀어 과장되게 토하는 시늉을 했다. 아나킨은 또 웃었다.
“너 빨간 줄 그이면 어떻게 취직하려고? 또 어머니 속 썩일 생각이야?”
“아이참, 오비완 형사님. 저 이미 직장 있다니까요?”
“거짓말 마렴, 아나킨. 직장이 있는 사람이 소매치기하다가 철창에 갇혀? 너 벌써 스무 살이다. 소매치기 정도는 훈방 처리해주던 10살 꼬마가 아니란 말이야.”
철창에 팔을 기대섰다. 10년 전 소년의 머리칼은 빛을 머금으면 반짝이는 블론드였다. 오비완은 그때를 바로 어제 일인 양 뚜렷이 기억했다.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사람이 북적일 수밖에 없었고 사람이 북적이면 소매치기도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주친 실력 좋은 꼬마 소매치기를 10년이 되도록 꾸준히 볼 줄 알았던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비완은 홀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잘거리기 좋아하는 청년은 조용하기만 했다. 오비완이 고개를 들자, 그는 청년의 두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청년은 오비완을 지긋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것만 같았다. 분명히 그랬다. 미간은 찡그렸고 눈썹에도 힘을 잔뜩 주었으며 입술은 절대 꿈적할 일 없다는 듯 일자로 굳어 있었다. 입가가 움찔 움직인 것도 같았는데, 그래서 오비완은 당황했다.
“왜, 그런 무서운 눈으로 보는 거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그렇게 말하고 오비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스무 살인 거 아시면서 왜 제 연락은 다 무시하세요?”
오비완은 아침부터 몇 번이고 울려대던 문자 알람을 떠올렸다. 여태 확인도 하지 않은 수많은 문자. 왜 연락을 무시했느냐고? 오비완도 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왜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지도…….
“요즘,” 오비완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시험 준비로 바빠서 그렇단다….”
“무슨 시험이요?”
“경사 시험을 보려고.”
어느새 점심시간을 끝나가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해치운 경찰관들이 경찰서 문을 열고 무리 지어 등장했다.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소리, 웃음소리, 발걸음 소리, 제각기 먹은 여러 음식 냄새, 바깥은 여전히 쌀쌀하다는 걸 잊지 않게 하는 냉기, 모든 것이 기분 좋게 뒤섞여 들어왔다. 그러나 오비완은 그쪽으로 고개 돌리지 않았다.
“경사요?”
아나킨이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도 벌떡 일어났다. 철창으로 단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었으면서도 더욱 가까이, 오비완의 바로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예의,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벌써 경사가 되시는 거예요? 축하드려요! 역시 형사님이라니까? 저를 처음 잡으신 분다워요!”
“그거 칭찬이니?”
“물론이죠. 10살 때부터 제 실력은 최고였다고요.”
오비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금방 나가게 해줄 테니까, 실력을 더 갈고닦던가 취업 좀 하렴.”
오비완은 곧장 뒤돌아 걸었다. 아나킨이 되려 과장되게 철창을 손으로 흔들며 “저 직업 있다니까요? 오비완? 제 말 들리세요? 형사님?”이라며 목청 높여 불렀으나,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내가 올 때까지 반성하렴.” 오비완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뒤에서도 잘 보이도록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 큰 애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일상이 될 줄 전혀 몰랐던 오비완은, 어쨌든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아나킨을 담당하고 있을 순경에게로 향했다. 제발 아나킨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일이,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태양의 퇴근 시간이 빠를수록, 오비완이 해야 할 일은 더욱 늘어났다. 오비완이 자처한 일이긴 했다. 그는 밤에 일하길 좋아했다. 모든 범죄는 밤에 일어날 것이라는 그만의 편견 덕분이기도 했고, 혼자서 조용히 또 느긋하게 일 처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그에게는 해가 떨어진 후의 싸늘한 밤이었다. 그는 오늘에야말로 마약 조직을 박살 내고 싶었다. 정확히는, 박살 낼 가능성이 0.1 퍼센트라도 있는 사소한 껀덕지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보원에게서 꽤 고급 정보를 받아낸 오비완은 이번 잠복근무를 한 달 전부터 계획했다. 마약 거래는 훨씬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던 것일 테지만. 분명 마약 조직이 오비완보다 한발, 아니 두 발은 더 앞서가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비완이 붙잡고 싶은 놈들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출현한 신생 조직이었다. 신생 조직은 간단한 일이라는 듯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본래 도시를 쥐락펴락하던 토박이 조직을 아랫사람처럼 부리기 시작했다. 이는 엄청난 일이었다. 야망을 품은 경찰이라면 누구나 마약 조직의 타파를 꿈꿀 테다. 특히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이라면 수년간 어두운 골목길에 자리 새를 매겨가며 마약과 무기를 거래하던 악랄한 토박이 조직을 뭉개고 싶어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조직을 한물가게 만든 새로운 루키 조직이 나타난 것이다. 옛 조직의 이름도 잊히게 만드는 슈퍼 루키. 오비완은 야망 있는 경찰이었다. 이번 일을 꼭 성공시켜야 할 이유가 그에겐 있는 셈이었다.
오비완은 차창 너머 멀리 보이는 낡은 창고를 주시했다. 건물로 통하는 유일한 철문 앞에는 거구의 남자 한 명만이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거구의 남자라고 해도 일개 직원일 뿐이리라. 중요 인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한 거래 시간만 알았더라도 이렇게 끈질기게 잠복근무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오비완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갑자기 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런 노크 소리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오비완은 깜짝 놀라 허리춤에 찬 권총으로 손을 뻗었다. 열린 차 문은 조수석 쪽이었고, 곧 닫혔다. 대신 조수석에 누군가 올라탔다.
“아나킨?”
“아직, 겨울이긴, 겨울이네요. 아, 추워!”
아나킨은 양손을 비비고 후 불며 조수석에서 몸을 움츠렸다. 오비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복근무를 하겠다는 보고서는 오직 경찰 서장인 콰이곤만이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건 극비 문서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경찰 내부 사람이라면 모를까, 민간인에 불과한 아나킨이 오비완의 잠복근무 장소를 알 방법은 전혀 없다고 봐야 무방했다. 콰이곤이 개인적으로 아나킨에게 오비완의 위치를 누설했을까? 그럴리 없었다. 공과 사는 언제나 철저히 분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대체, 이게 무슨 짓, 아니, 여긴 어떻게 온 거니?”
“제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아나킨은 그렇게만 말하고 메고 온 백팩에서 작은 노트북 하나를 꺼냈다.
“왜 이렇게 빨리 잠복하셨어요? 녀석들은 1시간 후에나 올 텐데. 여기서 2시간은 기다리시지 않았어요?”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당장 얘기하는 게 좋을 거다, 아나킨. 너한테 총을 겨누고 싶진 않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나킨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가 침 삼키는 소리가 꿀꺽, 하고 자동차 내부로 크게 울렸다.
“왜 벌써 총을 들이대시는데요! 저 아나킨이에요! 아나킨 스카이워커요!”
오비완은 권총의 안전장치가 걸려있는지 확인했다. 아나킨을 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용도였다. 위험을 미리 방지한다고 탈 나지는 않을 테니까. 민간인이 마약 거래 현장에 찾아올 수는 없는 일이니 아나킨은 민간인이 아니라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정의의 편인지 마약 조직의 편인지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분명 아나킨은 정의의 편일 테지만……, 이라고 오비완은 스스로 되뇌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니, 아나킨.”
“형사님 일 좀 도와드리려고……아니 우선 총 좀 치워주세요!”
아나킨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양손은 이미 귀 옆으로 바짝 들어 올렸다. 오비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 직업 있다고 했잖아요.”
“그 직업이 형사 뒷조사하는 일이니?”
“아니요!”
아나킨은 오비완에게로 조금 몸을 틀었다가 그의 매서운 눈길에 크게 숨을 들이켜곤 눈을 피했다.
“저, FBI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그래서 마약 조직 일도 좀, 알고 있는 거예요.”
“뭐?”
오비완은 어차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은 총을 거둬드렸다. 뜻밖의 이야기였지만 아예 못 믿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비완이 총을 다시 허리춤으로 꽂아 넣자 아나킨은 숨을 참고 있던 사람처럼 크게 헐떡이며 말했다.
“저도 나름 비밀을 유지해야 할 위치라고요?”
“그런 사람이 이렇게 당당히 찾아와서 마약 조직의 정보를 얘기해주니? 내가 의심 없이 ‘아! 그렇구나, 아나킨! 고맙다!’라고만 할 줄 알았어?”
그제야 아나킨은 백팩 안을 뒤지더니 안주머니에서 임시 FBI 뱃지를 꺼내 보였다. 오비완은 그 뱃지를 받아 들고 꼼꼼히 살폈다. 위조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10년간 옆집 꼬마처럼 생각해온 아나킨이 FBI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이 바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아나킨은 겁먹은 적 없다는 듯 뚱한 표정이 되어 팔짱을 낀 채 오비완이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오비완이 힐끔 쳐다보자 올곧은 눈으로 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오비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뱃지를 돌려주었다.
청년은 백팩에서 꺼낸 노트북을 마침내 펼쳐 보이며 오비완에게 자신이 모아온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아나킨치고, 꽤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는 오비완이 모아온 자료를 보잘 것 없게 만들 정도로 방대했다. 신생 조직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그 진짜 보스는 누구인지에까지 근접한 ‘진짜’ 자료였다.
“이래도 제가 필요 없으시다고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오비완은 그 자신만만함 때문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뒤에 여분의 방탄조끼가 있을 거다.”
“정말요? 저 역시 도움이 되죠?”
“절대 나서지 마, 넌 민간인이니까. 알겠니?”
아나킨은 이미 보조석 의자를 뒤로 꺾어 뒷자리로 기어가고 있었다. 더러운 운동화가 보조석 의자를 밟으며 발자국을 남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비완은 자신 한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재고했다. 그러다, NYPD라고 적힌 방탄조끼로 머리를 들이밀며 허겁지겁 움직이는 아나킨의 모습은 꽤 우스꽝스러워 오비완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렸다. 큰일은 없으리라, 이번 일은 그저 그들이 언제나 행하는 평범한 범죄 중 하나일 테니까. 오비완은 마지막으로 권총에 든 탄약을 확인했고 여분 탄약도 충분한지 점검했다. 총을 쓸 일이 아예 생기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어때요, 저 괜찮죠?”
그 말의 대답으로 오비완은 이렇게 생각했다.
‘미소 한 번 멋지게 짓네.’
모든 일은 예상을 빗나가는 일에 맛이 들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비완이 하는 일 모두가 어그러지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경찰차의 경보음은 뇌 전체가 흔들릴 만큼 시끄러웠다. 이번만큼은, 오비완은 그 경보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뒷통수를 쇠파이프로 얻어 맞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창고를 급습한 일은 어쩌면 올해 최고로 무모한 짓 트로피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콰이곤 서장은 일 년에 한 번씩 그런 멍청한 트로피를 하사하며 경관들의 사기를 높이는 일을 좋아했다. 어쨌든, 이번 사건도 그 트로피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이유는 다행히도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급습은 무모했던 만큼 대성공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지원군과 함께 안전히 창고를 급습할 수도 있었겠으나, 어쩌면 그때는 이미 늦었을 수도 있었다. 오비완이 무모하게 홀로 마약 거래 현장을 뛰어들었기 때문에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모두 잡아들일 수 있었다. 조직의 주요 인물은 없었으나 끄나풀들이라도 대거 잡아들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누구 한 명,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음에도.
오비완은 아나킨을 돌아보았다. 붉은 빛을 어두운 밤하늘로 쏘아대는 것은 경찰차뿐만이 아니었다. 흰 차체의 구급차도 수 십대의 경찰차 사이에 정차해 환자를 돌봤다. 검은색 담요를 뒤집어 쓴 아나킨이 그들의 유일한 환자였다. 그렇다고 크게 다치지 않았다. 거친 바닥에 쓸린 상처 뿐이라고, 한 순경이 오비완에게 소식을 전했다. 오비완은 소식을 듣고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관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지휘했다. 자리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순경이 되려, 안 가보셔도 됩니까? 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비완은, 자신과 그 경황없는 범죄 현장을 함께한 청년에게로 가지 않았다.
오직 이기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 그 일이란, 뜬금없게도 오비완의 꿈과 관련된 허상 같은 일이었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은 말도 안 되는 어떤 ‘힘’이 작동했고, 그 힘은 오비완만 알고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니까, 아나킨은 그 힘을 발휘할 줄 알면 안 되는.
오비완은 자신의 이름이 어째서 오비완인지를 생각했다. 어젯밤 꾸었던 기분 좋은 꿈에 대해서도 떠올려보았다. 빛이 나는 검을 휘두르는 사람들, 그중에는 자신이 있었다. 오래된 꿈이었다.
"형사님! 제 말 들리세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비를 쓴 경관이 건네주는 우산을 받고서야 오비완은 깨달았다. 이미 머리가 완전히 젖어버렸고 얼굴로 뺨으로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너무도 차가운 겨울 비였다. 아주 먼 과거, 아나킨과 헤어지게 되었던 그 불타는 별과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다.
오비완은 오랫동안 그 꿈을 그저 꿈이라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 단순한 꿈은 아니리라 믿었다. 아나킨을 만나서? 콰이곤을 따르게 되어서?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현실에 있는 인물이 꿈에 등장하는 일은 자연스러웠고, 그러므로 꿈을 단순한 망상으로 생각하는 게 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오비완은 그 꿈이 먼 과거 저편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이었음을 인정했다. 다만 그래야 했기 때문에, 그래야 할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걸 바라지는 않았는데, 오비완은 우산을 쓰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나킨이 지금까지도 포스에 얽매인 사람이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현실을 외면하는 짓은 오비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처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길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오비완은 질서가 흐트러진 범죄 현장으로 걸어갔다. 여러 경관이 뛰어다니며 바삐 움직였고 곧 몇 대의 경찰차가 더 도착했다.
*
그 후, 오비완은 아나킨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시간은 잘 흘러갔다. 하루 이틀은 일주일, 한 달, 반년을 훌쩍 넘게 되었다. 연락은 주기적으로 왔다. 전화통화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인지 일방적으로 문자가 왔다. 처음은 사과로 시작하는 말들뿐이었으나, 한달이 지난 시점에선 일상적인 대화가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가장 많았다. 나중에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묻고 자기는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나중에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묻고 뭘 하고 있죠? 다 알고 있어요 로 바뀌었다. 대부분 맞았다. 오비완은 아나킨이 FBI를 위해 사용하는 통신망을 이용해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는 게 분명하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막지 않았다.
예전에 끊어냈어야 할 인연이었다. 그 이상한 옛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오비완은 옛날에 겪은 것만 같은 꿈을 자주 꾸었다. 보통 행복한 느낌이었다. 꿈은 잠에서 깨어나면 잊히기 마련이니 느낌만 남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그 꿈이 선명히 기억에 남기 시작했고, 오비완은 마침내 그 꿈이 먼 옛날 있었던 일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꿈에는 아나킨이 나왔다. 지금과 비슷했지만 분명 달랐다. 그 꿈은 좋지 않게 끝났다. 그래서 아나킨을 멀리하려 했으나, 그 타이밍은 좋지 못했다. 오비완은 다만 문자가 그만 오길 바랐다.
*
문자가 그만 오길 바랐는데, 그 문자가 오늘에서야, 1년이 다 된 오늘에서야 문자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문자 대신 아나킨이 직접 집을 찾아온 것이다. 아나킨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다. 그를 어릴 때부터 알았다지만 둘의 사이는 그저 소매치기범과 경찰일 뿐이었다. 전화번호만이 유일하게 알려준 개인정보였다.
“이만, 가볼게요.”
아나킨이 그 말을 할 때까지도 오비완은 아나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나킨은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을,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돌리며 말했다. 오비완은 아쉬움을 남긴 채 그의 귀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아나킨은 축축해진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칼을 마저 닦고 털었다. 그동안 오비완은 식탁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가, 마라한다. 가지 말고, 몸을 좀 더 녹이렴. 아나킨은 대답한다. 오비완은 겨우 말했다. 좀 전에, 한 말은 무슨 뜻이니? 아나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수건으로 천천히 몸을 닦아낼 뿐이었다. 그는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전 사랑에 빠지는 게 무서워요. 당신도 그랬나요?
*
며칠 후 오비완은 좋은 꿈을 꿨지만, 다시 속이 좋지 않았다. 점심쯤 출근하겠다고 연락했고 그는 찬물에 샤워했다.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지만,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곧 봄이 올 것만 같았다. 날은 많이 풀어져 있었고 그의 마음만큼은 어째서인가 충만했다. 그는 또다시 허브티를 마셨고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제야 오비완은 기시감을 느꼈다. 혀를 데진 않았지만.
“오비완 경사님!”
언젠가 그러했듯, 제임스 순경이 오비완에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오비완은 그가 뱉을 말을 예상해보았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경사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뭐부터 들으실래요?”
“나쁜 소식 먼저 듣도록 하죠.”
오비완은 과거를 반복하는 짓이 반갑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틀을 깨부수고 싶었다.
“대답이 빠르신데요? 나쁜 소식이라…… 그런데 예전에 경사님이 형사일 때 말씀 하셨듯,”
“소식을 전하려는 본래 목적을 잊은 건 아니겠죠, 제임스 순경?”
제임스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아니죠!
“이번에는 확실히 나쁜 소식입니다. 그게, 그 녀석이 오랜만에 잡혀 왔네요. 그럼!”
제임스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사라졌다. 이번에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오비완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며칠 만에 다시 만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망설임은 컸다. 그때의 키스는? 그때 나누었던 대화는? 정리되지 못한 일이 많았다. 오비완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세게 쥐었다가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나킨을 데리러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사랑’이라는 말은 오비완에게 쓰린 기억만을 안겼다.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그 ‘사랑’이란 것 때문에 아나킨과 엮이게 된 사실이 어려운 시험 같았다. 오비완은 아나킨을 잊기 위해 일 년간 노력해왔다. 문자가 왔지만 보지 않았고 신경 쓸 수 있었으니 신경을 끊어냈다. 오비완은 마약 조직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갔고 경사 시험에도 합격했으며 좀 더 넓은 책상으로 옮겨왔다. 그는 미래를 살아가고 있었다. 머나 먼 과거, 그 우주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나킨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실력이 녹슬었나 보구나.”
재치있는 말을 꺼내기 위해 오비완은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철창 너머로 보이는 푹 숙인 고개는 미동도 없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아,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 일부러 잡혀 온 게 아닌 걸까? 오비완은 아나킨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사랑에 빠지는 게 무섭다고. 오비완은 여태껏 아나킨이 자신을 사랑해왔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바로 며칠 전. 그러니까, 어째서 그는 나를 사랑하는가?
아나킨, 하고 오비완은 다시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다. 오비완은 뒤돌아 걸었다. 마치 떠나듯이.
문제가 있다면 말하라는 오비완. 오비완은 양손으로 운전대를 꽉 쥔 채 말했다. 아나킨을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풀어준 뒤 점심을 먹으러 함께 가자며 억지로 끌고 나온 참이었다. 오비완은 자신의 단골집으로 아나킨을 이끌고 있었다. 아나킨은 그다지 말이 없었다. 오비완은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경사 시험은, 잘 되셨어요?”
“물론.”
그리고 다시 말이 없다. 오비완은 아나킨에게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고 싶었다.
“죽였대요.”
오비완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반문할 수도 없었다. 무게감이, 한마디의 무게감이 남달랐다.
“어린 애들이 참 많이 죽었대요. 저는 그저…….”
오비완은 옆을 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운전 중이었고 곧 좌회전해야했다. 좌회전하면 과속방지턱을 조심해야 할 것이고 그 후에는 다시 어느 방향으로 운전할지 되새김질 해보아야 할 것이고, 그리고, 계속 운전해야 했다.
“저는 그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었는데.”
“아나킨,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가 했던 일이요. 제가 한 일 때문에…….”
오비완은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오래 전 멀고 먼 은하계에서 있었던 일을 단순한 망상이나 환각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머나 먼 과거, 제자였던 청년이 다시 제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일 또한,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다, 오비완에게는.
오비완은 좌회전했다. 밝은 대낮이었다. 가는 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점심시간이었고 오비완은 이런 상황에서도 약간의 배고픔을 느꼈다. 아마 아나킨도 배가 고플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 그 후에는 더 큰 허기를 맞이하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두 남자를 태운 자동차는 처음과 똑같이 부드럽게 거리를 달려나갔다. 작은 흐느낌은 점점 무게를 더해갔고 침묵 또한 그 위로 천천히 쌓여갔다. 견딜 수 있어, 견딜 수 있다고. 오비완은 그 말을 되뇌었고 되새김질했고 떠올렸고 생각했고 집중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교통수칙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범인을 쫓는 목적도 아니면서, 거칠게 차를 도롯가로 불법 정차했다.
차가 완전히 멈춘 후에도 시간은 움직였다. 오직 시간만이 움직였고 오비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양손은 핸들을 붙잡고 있었고 앞을 보는 시선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나킨의 흐느낌 소리도 잦아들지 않았다. 오비완이 해줄 말은 적었다. 그는 말주변이 뛰어나고 협상하는 법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협상가였으나, 자신의 옛 제자 한 명은 달래기 어려워했다. 오비완은 아나킨이 언제나 어려웠다. 그 누구보다 소중히 대해주고 싶으면서도 너무나 어려워서, 가끔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킨.”
이름을 부르자 아나킨은 말하기 시작했다. 입을 열고. 오비완은 긴장했다. 그 옛날 있었던 일을 지금에야 후회하는 제자에게 어떤 말을, 어떤 위로를 해주어야 할까?
저는 FBI가 시키는 걸 했을 뿐이에요,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잖아요?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라고 믿었는데, 다 거짓말이었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제가 그래도 믿었던 사람은 정의보다는 돈이 목적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러니까…저를 고용했던 사람이요, 이런 얘기는 처음 해봐요, 저는, 그들이 부탁하는 정보를 잘 모았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잘 하는 일은 그거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 정보로, 저는 알지도 못하는 그런, 나라의, 어디를, 무기상에게 제가 알아낸 정보를 넘겼다더군요, 그건 정말 말이 안 돼요, 저는 어떡하죠? 제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이런 짓을 한 저도 사랑해주실 건가요? 오비완,
“오비완.”
아나킨은 긴말을 늘어놓았다. 오비완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었고, 지금 현재 일어난 일들,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비완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먼 과거, 전생이라고 해도 좋을 때의, 그때의 일을, 아나킨은 말하지 않았다.
“이리 오거라, 아나킨.”
오비완은 겨우 입을 뗐다. 그러나 마음은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에 대한 악몽을 들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비완은 몸을 완전히 틀어 아나킨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청년의 눈가는 완전히 짓무르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퉁퉁 부어오르게 될 것이다. 오비완은 그런 청년을 달래줄 수 있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청년은 망설임 없이 나이 많은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좌석 사이의 틈이 있었으나, 둘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온기를 조금이나로 나눌 수 있는 사소한 접촉이 필요했을 뿐. 오비완은 감히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청년은, 이 아름다운 청년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과거 있었던 ‘오더 66’에 대하여. 그 사실만으로 오비완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이기적인 안도감.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자신이 직접 저지른 일이 아닌 이 세상의 어두운 면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한 ‘사고’에 대해서 이렇게나 책임감을 느끼고 진심으로 슬퍼하고 자책하는 지금의 아나킨이, 오비완은 걱정되었다. 먼 우주에서 베이더로서 저질렀던 과거를 이 청년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나킨은 절대 과거의 꿈을 꾸지 않았으면, 싶었다.
“깊게 생각하지말거라. 사랑은,” 오비완은 아나킨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원할 때 생기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