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재생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반복재생됩니다.

Thinking 'Bout You - Dua Lipa
00:00 / 00:00

 Thinking 'bout you 

 레 딤 파   @wonderwall_ABC 

#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며 스쳐 지나갔던 그런 인연과 같다고 여겼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그런 순간.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손에 주어진 사진 한 장을 느리게 문지르다 손가락을 굽혔다. ‘굽히려 했다’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끊어지는 숨이 입안에서 빙글빙글 돌다 사진 위로 흩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사진을 구기는 대신 살포시 반으로 접었다. 배경과 인물이 절반으로 나뉘어 한쪽 모퉁이에 우연히 찍힌 단 한 사람의 모습이 남았다. 아나킨은 초점이 맞지 않는 그 사람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괜스레 손가락이 간지러워져 살그머니 거두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잊으려 했는데.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

   좀처럼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촬영을 했다. 과제라곤 하지만 이왕이면 완성도가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발길이 닫는 데로 움직였다. 겨울이 성큼 다가와 꽁꽁 언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던 아나킨은 추위를 달랠 겸 카페에 들렀다. 내부의 인테리어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커피를 기다리면서 손 가는 데로 셔터를 눌렀다. 은은하게 빛나는 전등이나, 서리가 낀 창문, 테이블에 놓인 머그잔 따위를 마구잡이로 찍다 보니 어느새 아나킨 몫의 음료가 준비됐다. 받아든 커피를 가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페를 빠져나올 때까지, 아나킨은 그 짧은 순간, 카메라에 무엇이 찍혔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익숙하게 사진을 모니터로 옮겨 결과물을 확인했다. 목적 없이 찍힌 다양한 이미지들 사이로 단 한 장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달칵- 클릭했다. 한층 더 확대된 그 사진을 빤히 보다, 그리운 이의 흔적을 발견한다. 작고 흐려서, 인식조차 못 하고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흔적. 아나킨은 최대로 확대한 이미지 속에 배경처럼 걸쳐진 인물을 모니터 위에서 더듬었다. 마치 실제로 만지는 듯 조심스럽게, 성급하지 않은 손길로 그를 문지르다 다급히 출력한다. 네모난 틀에 담긴, 카페 한구석에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는 남자.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는 익숙한 적금 빛이다. 긴 코트의 깃을 세워 입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결코 착각할 수 없는 그 사람. 피와 불길이 난무했던 전생의 죄이자 감정의 근원이다. 아나킨은 홀린 듯 사진을 매만졌다. 그를 보고 또 보면서, 사진의 매끈한 표면에서 느껴질 리 없는 체온을 탐했다.

   이른 아침 부스스한 눈을 뜨며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사진을 깨달았다. 다시 한번 유심히 들여다보자 졸음이 싹 달아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오비완이다.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 나서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아나킨은 가까스로 자신을 통제했다. 움찔거리는 두 발을 고정하고 사진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후, 하, 후, 하 짧게 끊어지는 호흡으로 자신을 달랬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상태로 팔을 휘적이며 사진을 보지 않고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이건 그저 우연일 뿐이다. 어떤 운명도, 빌어먹을 포스의 뜻도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나이며, 오비완은 오비완이다. 이런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극을 되풀이할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사랑과 집착으로 이어졌던 끔찍한 나날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이란 명목으로 비이성적인 집착을 낳았고, 통제를 원했으며 그 끝에서 목을 졸랐다. 아나킨은 떠오르는 암울한 기억에 머리를 휘휘 저었다. 다신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울컥 목이 멨다. 코끝이 메워지며 눈물이 핑글 돌았으나 곧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맺히는 방울을 털어냈다. 전생의 인연을 만난 게 처음도 아니잖아. 그들 모두를 무시하고 스쳐 갔듯 오비완에게도 그러하면 된다. 이번에도 다른 바 없었다. 아나킨은 부러 크게 미소지었다.

 

   아나킨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강의를 듣는 내내 집중을 하지 못했다. 턱을 괸 채 멍하니 한숨을 푹푹 쉬고, 밖에 나와선 하염없이 하늘을 보질 않나, 말짱히 걷는가 싶더니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에 부딪혀 나동그라지기까지 하였다. 그의 친구들은 기겁하며 -너 어디 아프냐? 걱정하거나 깔깔 웃으며 놀려댔다.

   힘겨운 하루를 마친 아나킨은 침대에 털썩 쓰러져 누웠다. 매트리스 위로 퉁겨지는 몸을 무시하며 신음한다. 며칠째 이어진 전생의 악몽과 오로지 하나로만 향하는 모든 사고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삶의 모든 것이 오비완을 쫓는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걷다가도, 눈을 감아도, 숨을 쉬어도, 아나킨의 세상은 오비완으로 가득 찼다. 한 번 터져 나온 감정은 마르지 않고, 오비완을 향한 사랑과 절실한 그리움만을 사정없이 쥐어짜 냈다. 온통 오비완뿐이다. 밤마다 잠을 몇 번이나 설쳤는지 아나킨은 벌렁거리는 심장과 축축이 젖은 식은땀을 손으로 훔치며 눈을 뜨기 일쑤였다. 그는 죽어가듯 신음하며 갑갑한 숨을 내쉬었다. 등이 끈적한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땀을 흘린 모양이다. 피로한 눈을 억지로 떴을 때,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던 사진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나킨은 잠시 뜸을 들이다 결국 팔을 뻗어 사진을 가져오고 말았다. 누운 채 몸만 모로 돌려 사진 속 흐릿한 오비완의 형상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 잔뜩 벼르던 일을 실행하고자 결심했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사진을 구기려 힘을 주려 한 것이다. 끝내자. 이런 방황은 옳지 않아. 그리 생각하며  손가락에 와락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그러지기 직전, 아나킨은 손가락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대신 사진을 반절로 곱게 접어 한쪽 면에 담긴 오비완의 모습을 조심스레 더듬는다. 손가락 끝이 무색하게 간질거렸다. 아나킨은 끊어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꺼풀에 들러붙은 미약한 희망과 미련이 떨어질 줄 몰랐다.

 

 

 

#

   아나킨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밤낮없이 오비완을 생각하니 잠은 대폭 줄고 눈 밑으로 데려온 검은 그림자에 장난기 많은 친구들조차 걱정을 해왔다.

 

   “너 진짜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진지해진 어투에 아나킨은 무심결에 묻고 말았다.

 

   “너무…. 간절하게 원했던 게 있는데, 그걸 다시 볼 가능성이 아주 조금, 먼지 한 톨 만큼이라도 있다면 넌 어떡할래? 하지만 본다고 해서 그 이상 뭘 어떻게 할 수는 없다면….”

 

   힘없는 아나킨의 목소리에 친구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너무나 쉽게 답을 내었다. -그럼 보면 되잖아. 되든 안 되든 간에, 멍청이처럼 지낼 바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단순하고 명쾌한 답이었다. 친구가 그 안에 깃든 복잡한 감정을 이해했을 리는 없었지만, 아나킨의 머릿속에 얕은 합리화가 불을 밝혔다. 그래,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오비완을 보자. 얼굴만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만 보고 잊어버리자. 아나킨은 힘없는 몸을 일으켰다.

 

 

 

#

 

   오비완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사진에 찍힌 그 카페 하나였다. 그저 우연히 들린 카페였을 지도 모르지만, 유일한 단서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나킨은 오비완을 다시 보기 위해 카페에 진을 쳤다. 카페 밖도 서성이고, 안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그 카페에 들렀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아나킨은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비비며 카페에 들어섰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싶은 생각과, 오비완이 이곳에 다시 올 거란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하지만 아나킨이 지닌 하나뿐인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운을 내기 위해 처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번지고 냉수를 끼얹은 듯 머릿속이 차가워졌다가 급격하게 열이 오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가, 오비완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킨은 입술을 달싹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렵게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보기만 하겠다던 다짐이 순식간에 스러졌다. 아나킨은 주문하기 위해 서 있는 오비완의 옆모습을 빤히 보다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힘이 빠진 몸으로 털썩 주저앉는다. 기어가듯 무릎을 끌고 가만히 내려와 있는 오비완의 손을 답삭 쥐었다. 축축한 눈물이 물길을 내며 온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다. 발그레한 뺨을 갈라진 물줄기로 수놓고, 붙잡은 오비완의 손에 제 이마를 대었다. 손등의 온기에 의지하며 어미 잃은 새끼 짐승처럼 낑낑거리고 훌쩍거렸다. 그야말로 통곡을 하며 뭉개진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오비완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지, 혹 무서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면서 아나킨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흐느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을 뿐이다. 무너진 아나킨의 뺨 위로 따스한 체온이 닿았다.

   “괜찮으세요?”

   휘어진 눈썹과 걱정을 가득 담은 두 눈이 아나킨을 향했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잿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를 보며 그제야 벼락처럼 깨닫는다. 오비완은 기억이 없구나. 다행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안도감이 아나킨의 마음속을 바늘처럼 찌르며 비난했다.

 

 

 

#

   오비완은 카페 바닥에 주저앉은 아나킨을 달래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카페 구석으로 데려가 앉혔다.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베푸는 친절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후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휘핑이 듬뿍 올라간 초콜릿 라테를 가지고 왔다. 척 봐도 달콤해 보이는 라테를 아나킨에게 밀어주며 오비완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드세요”

   차분한 그의 음성에 아나킨은 벌게진 눈두덩이를 닦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해요…. 대답하자 어서 먹으라는 오비완의 시선이 이어진다. 아나킨은 못 이기는 척 크림을 스푼 가득 떠 넣었다. 입속으로 퍼지는 달콤함. 아나킨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오비완은 자기 몫의 커피를 홀짝였다. 아나킨이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뒤늦게 사과를 했다.

   “정말 죄송해요….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착각해서….”

 

   말끝을 흐리며 진실과 거짓을 섞었다.

   “괜찮아요.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는 거니까”

   맑은 웃음소리가 아나킨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무척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목소리에 아나킨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입 밖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진 않을 순 있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단 걸 먹으면 한결 나아지니까요”

   아나킨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진정이 되자 아나킨은 오비완을 천천히 살폈다. 인제야 깨달았지만 오비완은 전생보다 약간 더 젊어 보였다. 그때도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행동이나 직위가 만들어낸 연륜이 실제 나이보다 들어 보이게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오비완은 단정히 빗은 머리나 깔끔하게 밀린 수염, 입가에 자리한 온화한 미소 덕인지 훨씬 어려 보였다. 그를 관찰하는 동안 오비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할 사람이 있으면 좋아요. 마음이 아플수록, 혼자 견디는 건 슬프거든요.”

   오비완의 조언은 아나킨의 오랜 상처를 건드렸다. 혼자 견디는 것. 환생하고 기억을 되찾은 순간부터 아나킨은 평생을 혼자 견뎠다. 자신의 죗값에 비해 가벼운 벌이라고 여겼으나,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비된 줄 알았던 흉터가 욱신거렸다. 아나킨은 씁쓸한 미소를 지우며 물었다.

 

   “….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아무래도 일 때문인지 자주 만나게 되는 터라…. 같은 조언을 해주곤 하지요.”

   그러면서 오비완은 조금 더워진 듯 코트의 깃을 내렸다. 그러자 아나킨은 여태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그의 목 주변을 감싼 흰색의 옷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의 목에 걸쳐진 하얀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그의 직업을 말해주고 있었기에 아나킨은 마르는 입술을 겨우 떼었다.

 

   “신, 신부님이세요…?”

 

   오비완이 눈썹을 으쓱였다. -네, 맞아요. 아나킨은 꽉 조이는 가슴 한쪽이 미치도록 답답해졌다.
 

 

 

#

 

   아나킨은 오비완과 여러 이야기를 하며 어느 성당에 있는지를 물어보고 전화번호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처음 그것을 제안하자 오비완은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사진과 학생인데 프로젝트 주제로 교회와 관련된 작업물을 진행하고 싶었다. 혹시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된다, 고민이 많은데 달리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오비완이랑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편해졌다. 앞으로도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느냐’라는 변명을 늘어놓자 설득되었다. 오비완은 대신 사진과 관련해선 미리 연락을 주라고 덧붙였다. 아무래도 신도분들이 있을 때는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기 때문이며, 다른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된다고 친절한 설명을 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아나킨은 스마트폰의 액정에 남겨진 오비완의 전화번호를 빤히 보며 자꾸만 솟는 광대를 가라앉히려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냥 모든 게 너무 좋았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어떠한 수식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그런 기분. 그와 눈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번호까지 나누었단 사실이 미치도록 행복하여,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현실이 덜컥 닥쳐왔다. 오비완은 신부였다. 그리고 신부는….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순식간에 밑바닥 치는 마음에 우울함이 켜켜이 쌓인다. 욕심내지 않기로 했잖아. 원래는 말도 붙일 생각도 없었으면서, 이 정도로 만족해 아나킨. 자신을 타박하며 베개를 주먹으로 팡팡 때렸으나 울렁이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한참을 소리 없이 괴로워하던 아나킨은 전화를 들어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고마웠어요. 오비완 :)]

   잘 쓰지 않는 이모지까지 붙여서 보내자 잠시 후 진동과 함께 답장이 왔다.

   [도움이 돼서 기뻐요 :)]

   문장 끝에 똑같이 붙어있는 이모지를 보자마자 아나킨은 끓는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베개를 마구 내리치고 만다.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는 걸까. 귀여워, 너무 귀엽잖아…. 묻어뒀던 사랑이 자꾸만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

   작품을 핑계 삼아 아나킨은 시시때때로 오비완을 찾아갔다. 큰 교회와 달리 화려하거나 웅장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빛을 머금어 곱게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조각에 얽힌 이야기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오비완과 함께 있을 시간을 늘렸다. 단순히 내부 사진을 찍을 때도 있었고, 성경과 관련된 부분이 무얼 뜻하는지 묻기도 했다. 오비완과 만남을 이어가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포스를 느끼고 직접 사용했던 아나킨은 그러한 초월적 힘도 결국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극단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몸소 겪은 산증인이었다. 그러니 현재를 살면서 종교적 가치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로 인해 아나킨은 현대 교회와 관련된 지식이 완전히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오는 아나킨이 귀찮을 법도 할 텐데, 오비완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답해주었다.

   만남이 이어지자 사적인 대화도 생겨났다. 작품과 관련된 일이 아니어도 커피를 사 들고 오비완을 찾아가는 것은 물론, 어떤 목적도 없이 연락하곤 했다.

 

   [학교 가는 중이에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오비완!]

 

   단순한 인사처럼 천천히 대화를 이어갔다. 혹여 자신이 성급하게 굴면 오비완이 불편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어 최대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 행동 덕분인지, 아나킨의 노력은 헛되지 않은 듯 싶었다. 오비완 역시 어느덧 자연스럽게 답장을 해주었으며 아나킨이 불쑥 찾아와도 더는 놀라지 않고 맞아주었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리는 신도들 사이로 빠끔히 고개를 내민 채 눈을 깜빡이는 아나킨을 발견하면, 오비완은 싱긋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

   “제 모델이 되어주실래요? 피사체가 필요한데 사람을 찍고 싶어서요.”

   한껏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오비완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꼭 모으고 최대한 간절하게 부탁했다. 오비완은 아나킨의 뜬금없는 제안에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건 해본 적도 없고,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아나킨의 작품을 제가 망칠 순 없잖아요”

   라고 한사코 거절했으나 아나킨은 무척 강경했다.

   “제가 하려는 주제를 표현하려면…. 아는 사람이 오비완 뿐이에요. 제발 부탁해요. 오비완.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일주일에 한 번씩만, 딱 하루만 제 모델이 되어주시면 안 될까요?”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하염없이 불쌍한 표정을 짓는 아나킨에게 마침내 오비완은 항복을 선언했다. 난감한 듯 어색하게 턱을 매만지는 오비완의 손길에도 아나킨은 환히 웃었다.

 

 

 

#

   매주 화요일, 아나킨과 촬영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 되자 오비완은 우습게도 꽤나 떨고 말았다. 사진에 담길 모델이 된다고 생각하니 어색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아나킨은 뻣뻣한 오비완의 어깨를 연신 주무르며 긴장을 풀어주려 애썼다.

   “평소처럼 하면 돼요. 오비완은 언제나 완벽하니까요.”

   배시시 웃는 미소와 과한 칭찬에 오비완은 어쩐지 낯간지러워져서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손부채질을 하여 열을 내리고, 목을 가다듬어 최대한 자연스레 행동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오비완의 손발이 동시에 움직이는 순간, 아나킨은 참지 못하고 새털같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어버렸다. 마치 엄청나게 사랑스러운 것을 본다는 듯, 보드랍게 피는 미소에 오비완은 두 뺨을 확 붉히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웃지 말아요. 아나킨….”

 

   손바닥 아래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꾸물거렸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새로운 모습에 자꾸만 방실방실 입꼬리가 치솟았으나 더 놀렸다간 오비완이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최대한 웃음기를 지우며 오비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오비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 여전히 붉은 얼굴을 모른 척하며 창가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오비완의 손을 잡아 창틀에 얹게 한 뒤, 오비완의 목덜미를 살짝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좋아요. 그리고 이렇게….”

 

   엄지와 검지로 그의 턱을 살포시 쓸고 가볍게 두드렸다.

   “시선은 위로 들고, 불편하면 앞으로 살짝 기대도 돼요. 무게 중심을 조금 앞으로 해보고…. 네 좋아요”

   아나킨의 손은 어느새 오비완의 허리를 살며시 잡아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자세는 편해졌지만 빈틈없이 바싹 붙어있는 몸에 오비완은 왠지 모르게 목이 타는 듯했다. 반사적으로 침을 꼴깍 삼키자 아나킨이 손을 떼며 물러섰다.

   “완벽해요. 이제 찍을게요”

   두 사람 사이를 연 달은 셔터 소리가 가득 채웠다. 오비완에게 닿았던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베어났다. 못 견디게 간지럽고 피부에 열이 올랐다. 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것은 처음이었다. 아나킨은 형편없이 빨개졌을 얼굴을, 카메라 뒤로 숨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촬영을 약속한 날이 되면 잔뜩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오비완의 찰나를 사진 속에 담고, 영원토록 간직할 수 있다는 비밀스러운 행복. 아나킨은 그 날이 되면 쉴 틈 없이 사진을 찍었다. 몇 번 더 촬영한 뒤로 오비완 역시 첫날보다 편해져 이젠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가끔 장난을 치며 재밌는 표정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아나킨이 조금만 언질 줘도 금방 자세를 잡아주곤 했다.

 

   아나킨은 대화 하나 없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유리병에 넣어둔 편지지처럼, 꼭꼭 잠가두었으나 투명한 면 너머로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는 사랑. 아나킨은 그를 렌즈 안에 담아내며 이보다 더 내밀한 시간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속에 싹트는 오랜 그리움이 차차 메꿔지며 시린 외로움이 무뎌져 갔다.

   아나킨은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욕심이 아니라 용기. 그의 다양한 순간들을 담아내고 싶은 마음이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고민하던 아나킨은 긴장한 입술을 움직였다.

   “…저, 혹시 오늘은 우리 집에서 찍어도 될까요?”  

   오비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유를 물었다.  

   “성당에서 찍는 것도 좋지만, 그러니까…. 좀 더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고 싶어서요. 종교라는 게…. 그렇잖아요. 어디든 있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거요. 아무래도 카페나 거리에서 찍는 건 많이 부담스러우실 거 같아서….”

   말끝을 흐리는 아나킨은 무심결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집에 초대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오비완은 아무 생각이 없을 텐데, 자신 역시 그런 종류의 사심이 섞인 초대가 아니었다. 지금의 오비완을 욕심낼 정도로 양심 없지 않았다. 그저 오비완과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을 뿐이며, 그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었을 뿐이다.

#

   오비완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아나킨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오비완이 여러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하도 긴장을 하여 제대로 대답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오비완은 곧 크게 감탄했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가리키며 –아나킨이 찍은 거죠? 묻는다. 아나킨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고 그는 –제가 사진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실력이 정말 좋네요. 라며 사륵 접히는 눈웃음으로 보답했다. 아나킨은 콩콩 뛰는 심장 부근을 꾹꾹 누른다. 쓸데없는데 의미 부여하지 말자. 또 한 번 다짐한다.  

   아나킨은 오비완이 집을 구경할 동안 간식거리와 차를 내왔다. 평소에 집에서 잘 먹지 않는 그였으나 오비완을 생각해 미리 구비해 둔 것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집어 든 오비완의 얼굴이 풀어졌다. 붉은색의 잎차는 꽃 향이 물씬 풍겨 어떤 종류의 것인지 바로 깨닫는다. 언젠가 아나킨에게 이 차를 좋아한다고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아나킨은 다정하네요. 섬세하기도 하고….”

   향을 음미하며 중얼거리자 아나킨은 이내 얼굴을 토마토처럼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 정도는 아닌데... 입술을 꼭 깨물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참 순진해 보여 오비완은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

   촬영이 시작되자 오비완은 다시금 어색해지고 말았다. 교회는 그나마 익숙한 장소기라도 했는데, 타인의 집은 완전히 처음인 터라 더욱 어정쩡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카메라 너머로 오비완을 담아내던 아나킨이 오비완의 자세를 고쳐주기 위해 다가왔다. 오비완의 팔을 잡아 편한 자세로 옮겨주고, 다른 손으로 턱을 괴게 도와주었다. 무릎 위로 올려둔 손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돌려주기도 했다. 그런 도중에 흘러내린 앞머리 가닥까지 집어 살짝 넘겨주며 아나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됐다. 예뻐요. 오비완.”

   아나킨의 볼 위로 퍼진 복숭아 같은 분홍빛이 눈매를 따라 곱게 물들었다. 오비완은 한층 가까워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현듯 그들의 자세가 너무 밀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촬영했던 첫날에도 이러했던 것 같은데…. 아나킨이 가까워질 때마다 느껴지는 기묘한 감정이 자꾸만 오비완을 울렁이게 한다. 카페에서 아나킨에게 손을 잡힌 날도 그러했다. 평소라면 울먹이는 아나킨과 이야기를 나눈 후, 번호를 교환하는 일 따윈 없었을 텐데. 오비완은 그러한 만남을 사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나킨에게는 선을 긋기 어려웠다. 모델 일을 수락한 것도 누군가 알게 된다면 농담이 지나치다 우스갯소리 취급을 할 게 뻔할 정도로, 오비완은 무감한 사람이었다. 공과 사가 뚜렷하고 교회의 일을 제외하곤 선을 확실히 긋는 그런 사람. 평생을 주님께 바치겠다 다짐하였는데, 아나킨을 보면 그런 다짐이 무색해져 그의 모든 제안에 응하고 싶어진다. 이 감정이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따끈한 손바닥이 뺨을 감싸자 그제야 오비완은 정신을 차렸다.  -오비완? 걱정을 가득 담고, 낮은 음성으로 그를 부르는 아나킨에게 오비완은 무의식적으로 묻고 만다.

   “…아나킨, 내게 무엇을 원해요?”

   아나킨은 오비완의 질문이 자세에 대한 질문이 아니란 걸 직감한다. 그의 어긋난 시선이 뜻하는 바를 단번에 깨닫는 것이다. 나의 접촉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을 오비완도 느끼고 있었던 거야. 숨이 덜컥 막힌 아나킨은 무슨 답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라가는 입술만 느꼈다. 그리고 일렁이는 목울대가 충동적으로 답을 결정한다. 오비완의 얇은 입술 위로 아나킨의 것이 얹어졌다. 성급하게 움직이거나 밀어붙이는 접촉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맞대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나킨은 머릿속은 새하얗게 표백되고 동시에 뜨겁게 폭발하는 심장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귓가를 울리는 고동 소리. 고함을 치듯 웅성거리는 박동이 아나킨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한다.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알 수 없는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아나킨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겨우겨우 입술을 물렸다. 오비완의 건조한 시선이 아나킨을 향했다. 침묵을 가르며 오비완이 입을 연다.

   “…이제 알겠네요”

   아나킨의 입술이 닿았던 흔적을 슬며시 더듬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

   아나킨은 베갯잇을 쥐어뜯으며 눈물 콧물을 다 빼며 울었다. 부르튼 눈가를 연신 천에 비비며 한심한 자신을 비난했다. 이 바보 멍청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멍청한 놈. 자학하고 또 자학하며 오열을 했다. 이제 평생 오비완을 보지 못할지도 몰라. 욕심내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겠다 다짐했으면서, 넌 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어떻게 거기서, 거기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멈추지 않는 눈물이 아나킨을 망가뜨렸다.

   아나킨은 오비완을 잊기로 했다.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면 안 됐던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오비완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한시라도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아나킨은 스스로 벌을 주듯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학업에 매진한단 핑계로 날을 꼬박 새우고, 일부러 병이라도 걸리게 할 작정인지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셔츠 한 장으로 밖을 돌았다. 하얀 입김을 폴폴 풍기고, 볼이 발그레해진 아나킨을 본 친구들이 기겁하고 옷을 입혀주려 했지만 극구 거부했다. 너 진짜 미쳤냐며 화도 내봤지만 어떤 말에도 아나킨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단지 정신을 놓고 싶어서, 오비완을 잊기 위해 자신을 혹사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오비완에 대한 생각을 도무지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춰지지도 않았다. 어느 곳을 보고, 어디를 가도 오비완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으며 그의 미소는 잔상처럼 남아 아나킨의 눈꺼풀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열에 들뜬 눈가를 꾹 짓눌렀다. 이것이 열로 인한 환상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

 

   아나킨은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벽을 보았다. 언젠가 오비완의 사진을 현상해서 벽에 붙여놓았던 게 오늘따라 더 깊숙이 들어왔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튼 피부를 시큰거리게 만든다. 툭툭 방울져 떨어지는 물기를 닦지도 못하고 아나킨은 뿌연 눈만 지그시 감았다. 그만해야 하는데. 그만 떠올려야 하는데. 도저히 오비완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커튼 틈으로 흔들리는 햇빛에 아나킨은 몽롱한 눈을 떠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수업이 뭐더라…. 휴대전화의 액정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화요일’ 액정에  떠 있는 그 단어에 새삼 꼬박 일주일이 지났음을 깨닫는다. 아나킨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눈두덩이를 마구 문질렀다. 학교나 가자. 이리저리 쑤시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누가 봐도 상당히 아파 보이는 아나킨에게  동기들은 심각한 얼굴로 오늘은 집에 가서 쉬라고 종용하였다. 평소라면 넘겨버린 말들이나 힘이 없는 아나킨은 결국 떠밀려서 학교를 빠져나가야 했다.

 

 

 

#

   오비완은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에 손을 녹였다. 벌써 제법 추워진 것을 보아 이번 겨울은 작년보다 더 쌀쌀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김만큼 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에 드문드문 걸려있다. 교회 입구에 서서, 괜히 하늘만 한창 바라보고 있자니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졌다. 오늘이 ‘그 날’ 이기 때문일까. 아나킨과의 촬영이 있는 날. 몇 번이나 찍었다고 어느새 익숙해진 일과가 되었다. 아나킨이 제게 키스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잡을 수 없는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벌써 그리되었다.  그것이 오비완을  울적하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연락 한 통 없었고, 오비완 역시 아나킨에게 구태여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오늘 그가 올 리 없었다. 쓸데없이 밖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부질없었다. 손끝이 시려질 무렵 오비완은 미련을 털어내며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그와 동시에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온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힘없이 걸어오는 아나킨이 보였다. 이 추위에 제대로 된 외투는커녕, 셔츠 한 장만 달랑 입은 채 휘청이며 걸어오는 아나킨을 보자마자 오비완은 반사적으로 뛰쳐나갔다. 아나킨을 부르며 그의 팔을 붙잡아, 왜 이러고 다니느냐며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허둥지둥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아나킨의 어깨에 걸쳐주고 그의 찬 뺨과 이마를 더듬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화끈한 체온은 아나킨이 분명 어딘가 좋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아나킨의 뺨을 잡아 풀린 시선을 제게 고정하며

   “아나킨? 아나킨! 정신 차려봐. 이런, 열이 너무 심한데, 안 되겠다. 우리 병원 가자 응?”

   하고 연신 달랜다. 아나킨은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정신으로 가까스로 초점을 맞추었다. 볼을 감싸는 찬 손이 포근하고 안정적이라, 아나킨은 맘껏 칭얼거리며 뺨을 비볐다. 그 시원한 손에 제 손을 겹치고 꼭 달라붙었다.

 

   “나 진짜 오비완이 너무 보고 싶었나 봐요…. 내가 꿈을 꾸나 봐”

 

   라고 중얼거리며 그토록 바랐던 사랑을 표했다. 오비완은 아나킨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라 판단했다. 이렇게까지 자제 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치대오는 모습은 평소의 아나킨과 전혀 달랐다. 오비완은 태산같이 쌓이는 걱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순간, 아나킨이 무너지듯 고꾸라졌다. 풀썩 꺾이는 그의 몸을 오비완이 가까스로 받쳐 안았다. 한쪽으로 쳐지는 무게를 엉거주춤 지지하며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눕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오비완을 극도로 긴장하게 만든다. 선뜩할 정도로 시린 충격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며 온몸의 피가 죄다 빠져버린 기분이다. 소란스러운 심장을 최대한 억누르며 오비완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

   아나킨이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희끄무레한 천장이 보였다. 하얗고 고른 천장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자 문득 방금까지 집에 가고 있던 길이었단 사실이 떠오른다. 좀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살짝 내리자 팔뚝에 꽂힌 링거가 보였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비현실적이었다. 그런 아나킨의 눈을 따스한 손바닥이 사륵 감겨준다.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살을 간지럽히자 -더 자렴. 아나킨. 이라는 부드러운 음색이 흘러나온다. 무척이나 그리운 목소리가 노랫가락처럼 아나킨을 다독이자 그는 더 저항하지 않고 수마에 몸을 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결 가벼워진 머릿속이 사태를 파악했다. 병원에 실려 온 것이란 지극히 당연한 답이 떠오르자 어지간히 미련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성공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계획이었다. 헛것을 제대로 보긴 했으니까. 결국, 이 꼴이 되었지만 아픈 덕에 환영으로라도 오비완을 만나지 않았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었다.

   “정신이 좀 들었나 보구나.”

   아나킨은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홉뜨며 잽싸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려, 스프링처럼 튕기듯 몸이 솟았다. 부드럽고 차분한 손길이 다가와 그런 아나킨의 허둥대는 등을 받쳐주었다.

 

   “조심해야지.”

 

   단호한 말투에 아나킨은 유령이라도 본 듯 연신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오, 오, 오비완??”

   수없이 더듬거리며 그를 부르자 오비완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눈썹 한번 으쓱했을 뿐이다.

 

 

 

#

 

   아나킨은 자신이 보고 겪었던 그 순간이 열로 인한 환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 뜻은……. 내가 온갖 추한 꼴을 다 보였단 거지…? 다시 한번 얼굴이 뜨거워지며 숨이 막혔다.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면을 세울 수가 없었다. 두 손바닥을 가득 펴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인 채 끙끙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게 전부였다.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스러움에 몸을 뒤트는 아나킨의 이마 위로 오비완의 손이 불쑥 찾아들었다. 아나킨은 파드득 떨며 오비완을 바라보았다. 곧 이어진 딸꾹질이 히끅대며 튀어나오자 오비완은 슬그머니 손을 떼며 물러섰다.

   “얼굴이 빨갛길래. 다행히 열은 없구나”

   이어지는 미소를 보자 아나킨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날 일…. 은 죄송하다, 제가 주제넘었다, 기분이 나쁘셨을 거다? 으으으…. 정리되지 않은 무수한 말들이 입안을 빙빙 맴돈다. 복잡한 아나킨은 딸꾹질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문득 오비완에게서 어딘가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꼬물거리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아 내려가고, 찬찬히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은 오비완을 바라보자 그 역시 눈을 마주해온다. 아나킨은 꼴깍 침을 삼키며 직감을 따랐다.

 

   “…마스터?”

   오래된 호칭으로 그를 부르자 오비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아나킨에게 답을 해온다.

   “눈치가 없진 않구나. 나의 옛 파다완아”

   보기 좋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아나킨은 훅 치미는 그리운 울렁거림에 다급히 눈물을 숨긴다.  

   “어, 어떻게…. 기억이, 기억을….”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아나킨의 가여운 눈물을, 오비완의 손길이 하나둘 거두었다.
 

 

 

#

   오비완이 기억을 되찾은 것은 최근이었다. 아나킨이 입을 맞춰온 날, 바로 그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나킨을 만날 때마다 단호히 정의할 수 없는 기이한 설렘과 두근거림에 몹시 불안했다. 평생을 신께 바치겠다던 맹세는 결단코 거짓이 아니었고, 아나킨을 만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아나킨의 반짝이는 미소를 떠올리자 가슴 속이 뻐근하게 아려온다. 낯선 통증을 지그시 누르며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흘려내고자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아나킨에게 느끼는 불경한 감정을 반성하고 뉘우치고자 끊임없이 신을 찾았다. 하지만 지잉- 울리는 진동 소리 한 번에 어깨가 움찔거리고 황급히 휴대전화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는 것이다. 끝내 망설이던 팔을 뻗어 아나킨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면 그러한 죄책감은 소금이 물에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말았다. 아나킨이 내게 특별한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오비완은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나킨의 손길이 신체를 스칠 때마다, 가슴속이 찌릿한 이 감각은 사제로서 부적절하기 짝이 없었다. 파란 눈이 곱게 접히며 간지러운 미소를 흘리자 오비완은 그와 포옹을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한 충동을 하마터면 실행에 옮길 뻔도 하여, 오비완은 두 다리를 땅에 박아 넣을 듯 힘을 주어야만 했다. 아나킨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열이 올랐다. 그렇기에, 아나킨에게 떠넘기듯 묻고 만 것이다. -내게 무엇을 원해요? 일생 중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 비겁한 물음에 아나킨은 키스로 답했다. ‘키스’ 라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어린아이의 입맞춤 같은 접촉이었으나 오비완은 단번에 함락당했다. 감정이나 육체적 욕구가 아니다. 꼭꼭 가둬두었던 기억의 댐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실금이 가있던 벽은 모래 알갱이처럼 스러지고 물밀듯이 넘실거렸다. 자리를 도망쳐 나온 오비완은 혼란한 감정의 근원을 마침내 깨달았다.

   사제관으로 돌아온 오비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둔 옷이 갑갑해서 로만칼라를 거칠게 풀었다. 제 손에 잡힌 흰 테를 보자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실소가 샜다. 허탈한 웃음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온다. 오비완 케노비,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오비완은 넘실대는 기억의 파도에 몸을 실어 눈을 감는다.

   아나킨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되찾은 기억은 뒤죽박죽 고장 난 시계태엽처럼 헛돌았고, 아나킨을 향한 감정도 정신없이 날뛰었기에 그 역시 시간이 필요했다. 아나킨 역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나킨이 어떤 목적으로 제게 접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없는 나에게 뭘 원했길래? 키스가 답이 되진 않았다. 어떤 욕구를 해소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새로운 관계를 원했던 건지…. 불쑥 억울함이 솟는다. 짜증스레 머리칼을 넘기며 턱에 힘을 주었다. 전자라면 아나킨 그놈을 매우 때려주리라. 어떻게 신부인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해? 물론 나 역시 아나킨 때문에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아나킨의 불순한 마음은 무척 사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비완은 그 뒤로 기억을 자주 헤맸다. 마치 오래된 필름 영화를 틀어놓은 듯 끊어지고, 지워진 장면들이 하나둘 튀어나와서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웠다. 찬바람을 맞아 정신을 차리고자 교회 밖으로 나와 우두커니 섰다. 아나킨과의 일이 있은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었다. 화요일마다 방방 뛰며 숨찬 미소를 짓던 아나킨을 떠올리자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빠져나왔다. ‘오비완! 오늘도 잘 부탁해요!’ 방실방실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아나킨이 그린 듯이 선명했다. 유치한 감상은 손끝이 시려질 무렵 끝이 나고 말았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자 고개를 돌린 순간, 그 찰나 아나킨이 보였다. 옷이라곤 셔츠 한 장 달랑 걸치고 눈가를 빨갛게 물들인 채 휘청이며 걸어오는 모습. 오비완은 그 모습에 더럭 겁이 나 다급히 아나킨에게 달려가 그를 챙겼다. 그리고 아나킨은 얼마 안 가 정신을 놓았다. 뜨끈뜨끈한 얼굴로 밭은 숨을 몰아쉬는 아나킨에 오비완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호흡이 가빠지며 세상이 어지럽게 울렁인다. 이러지 마. 내 앞에서 이러면 안 돼. 바들바들 떨리는 제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쥐며 숨을 고르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성을 잃어선 안 된다. 오비완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겨우 추슬러 도움을 청했다.

   구급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오비완은 아나킨과의 관계에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친구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들을 어찌 정의해야 할지, 신도 모르실 거라 생각했다. 병실에서 링거를 통해 해열제와 진통제를 맞는 아나킨을 바라보며 오비완은 덧없는 한숨을 푹 쉬었다. 땅이 꺼질 듯 연달아 내뱉고, 마침내 다시 그를 보았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열 탓에 두 뺨 위로 동그란 홍조가 피어있다. 문득 아나킨이 이전의 생에서 최초로 앓았던 열감기가 떠오른다. 짧은 브레이드가 아나킨의 귀밑에 놓여있고, 아이는 힘이 드는지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오비완은 밤을 새우며 아이를 간호했다. 아나킨은 기억하지 못할 테나 여린 뺨에 맺히는 땀과 눈물을 수없이 닦아냈던 이가 오비완이었다. 스승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몹쓸 파다완, 어서 건강해져야지. 뒤채는 아이를 위해 난생처음 자장가를 불러주었던 것도 그 날이었다.

 

   오비완은 상념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았다. 꼭 그때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움푹 꺼진 눈가와 수척해진 뺨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프지 말거라. 아나킨의 이마 위로 망설이던 입맞춤이 내려앉는다.

 

 

 

#

   한바탕 우는 통에 열이 도로 올라 끙끙대는 아나킨을 보자 오비완은 잔소리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눈물의 원인이 자신이란 걸 떠올리자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기억을 되찾았단 사실은 퇴원한 후에 말해줄 걸 그랬나. 그렇지 않아도 아픈 애한테…. 너무 성급한 고백이었던 것만 같았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아나킨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오비완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오비완은 항상 그랬으니까. 그렇게 자기 탓만 하는 나쁜 버릇 아직도 못 버렸죠”

   오비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작 앓고 있는 게 누구인데, 그렇게 안타까운 눈빛으로 걱정을 하다니. 여전히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오비완의 미약한 웃음소리에 아나킨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진짜예요. 난 괜찮으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오비완. 나는…. 오비완이 말해줘서 너무 고마운데”

   이번엔 조금 더 밝아진 목소리였다. 아나킨은 굳어있던 눈매를 장난스레 찡긋거렸다. 오비완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해서, 오비완은 고개를 저으며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여전히 따끈한 이마와 볼을 차례로 만지며

   “알았으니 빨리 낫기나 하렴. 꼴이 이게 뭐니”

   투덜거리자 아나킨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뺨에 머물던 손바닥이 어느새 아나킨의 입술 위를 가리고, 쪽- 작은 입맞춤이 닿는다. 오비완은 아나킨의 장난에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열이 올랐다. 뒷목이 홧홧하고 뜨거워져서 오비완은 다급히 손을 빼 등 뒤로 숨겨버렸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자 아나킨은 한층 더 장난기가 가득해져 빙글거린다.

   “감기는요, 옮기면 낫는데요.”

오비완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표현을 대신해 눈을 흘겼다. 아나킨의 입술 사이를 맴도는 키득거림이 한층 더 당돌해졌다.

   “그러니까, 키스해 주세요. 오비완”

   뻔뻔하기 짝이 없는 부탁을 해오는 아나킨은 침대 등받이에 허리를 쭉 붙이며 예쁜 입술을 쏙 내밀기까지 했다. 마치 전생의 아나킨처럼, 건방지고 짓궂은 태도였다. 오비완은 문득 자신이 그것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타박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결국 아나킨의 장난 한 번에 웃어버리고 말았던 그 시절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이젠 눈까지 내리감은 채 몸을 꼬며 -빨리요! 떼를 쓰는 아나킨을 보자 오비완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두 손으로 아나킨의 얼굴을 감싸자, 동그란 눈꺼풀이 반짝 뜨였다.

   “내가 아프면 간호해줘야 한다 아나킨”

   나긋하게 속살거리는 숨결이 아나킨의 입술과 겹쳐진다. 놀란 것도 잠시, 그의 옷깃을 절박하게 붙잡아 당기는 아나킨을 느끼며 오비완은 진정으로 환속을 고려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2020 by AnaobiModernAUproject2020.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