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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딛 투 @R2d2210
너를 본 건 늘 지나던 병원 앞 횡단보도에서였어. 삼 일 만에 퇴근한 지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우산을 든 채 버티고 있을 때 넌 내 앞에 멈춰 섰지. 창문이 열리고 조수석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는데 내가 서있는 위치에선 얼굴이 보이지 않더구나. 하지만 목소릴 듣자마자 알 수 있었어. 그게 너라는 걸 말이야.
“역까지 태워드려요?”
그 짧은 한마디에서조차 느껴지는 긴장감은 나까지 덩달아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단다. 제 신발이 다 젖어서요. 뭉뚱그린 말에도 그저 괜찮다고 했어. 열린 창문 사이로 보인 네 얼굴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 사랑에 빠진 것과 동시에 몹시도 불행해 보여 나는 그 차에 타지 않을 수가 없더구나.
조수석에 앉자 창문은 지잉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빗방울은 투둑투둑 차창을 두드렸지. 옆구리를 선득히 눌러오는 칼날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을 때, ‘잡았다’ 네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들뜬 모습에 나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단다. 어쩌면 상황에 알맞은 반응이었을 테니 그다지 이상해 보이진 않았겠구나.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차는 천천히 출발했어.
너는 나를 병원에서 처음 봤다고 설명했어. 우연히 들렀다 나오는 길에 화단 구석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눈길이 갔다고 했지. 흰 가운을 입고 희고 긴 한숨을 태우며 뱉는 모습이 묘하게 에로틱한 탓에 다음 타깃으로 삼아야겠다 마음 먹게 되었다며 너는 작게 웃었어. 나는 그런 너를 눈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지.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렇군요.” 그렇게 답을 하자 어쩐지 너는 기분이 상한 듯 보였지.
내가 두렵지 않나요? 라고 물어왔을 때는 무슨 답을 해야 하나 망설였어. 그래서 대답을 하지 못한 거야.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니죠? 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을 땐 솔직하게 고갤 저었지. 단지 나는 너를 오래 기다려왔고 막상 기다리던 그 순간이 되자 어안이 벙벙해진 거라 말하고 싶었어. 그간 어떻게 살아온 걸까? 얼굴은 거칠었고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모습 보단 지쳐 보였거든. 가늠하긴 어렵지만 너도 결국 이 세월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구나 싶었지. 가늠조차 불가한 긴 시간 동안 움트고 저물며 우린 어떠한 시기가 되면 반드시 마주쳤단다. 그 끝은 늘 같았지. 이젠 너도 알 거야. 우린 그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 다양한 방법으로 마지막을 맞이했어. 칼로, 창으로, 시간이 흘러 때론 총으로. 슬펐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우습지만 이 상황이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 그래서 지금도 그다지 두렵진 않구나.
단지 기다림은 늘 못 참겠다 싶을 만큼 지루했고 이번엔 특히 길다 싶었거든. 무려 35년의 세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되도록 죽음이 가까운 곳에 가만히 서서 너의 방문을 기다리는 일이었으니까. 아마 네가 나를 본 그날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이번엔 좀 늦네, 어디에서 무얼 할까. 그렇게 나는 널 기다렸어.
네가 기대하는 반항이란 당신의 운전을 방해하는 것이나 혹은 문을 열고 도망치려는 것 정도였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지금 몹시 지쳐있기에 그런 의미 없는 행동으로 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아. 곱슬 진 머리칼부터 둥그런 이마와 잘난 코끝을 거쳐 예쁜 호선을 그리는 너의 입술까지 천천히 눈에 담지.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는 유일한 시간이야. 행복한가요? 처음으로 건넨 내 질문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넌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어. 그렇군요. 라는 나의 답변에 다시 기분이 상한 듯 보였지만.
차는 교외로 빠져 순식간에 한적한 길로 들어섰고 너는 익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더 좁은 길로 향했어. 타닥타닥 유리창을 치는 나뭇가지가 빗소리와 섞여 어색한 침묵을 달래주었지. 서로 나눌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편하더구나. 너도 그랬을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차가 멈춰 선 뒤 시동이 꺼지고 날 잡아 이끄는 손길을 따라 네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 나는 네가 나에게 차 한 잔쯤은 권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조금 서운했단다.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겠구나 싶었어. 이 이후론 너도 알다시피, 갈증에 타는 얼굴로 문을 나선지 좀 되었으니 이제 곧 돌아올 테지.
이건 너에게 남기는… 부디 이번엔 마지막 이길 바라는 나의 메시지란다. 내가 네 품에서 마지막 숨을 뱉으면 이제 넌 날 기억하게 될 거야. 아나킨. 나의 소중한 아나킨. 그렇다면 잠시만 슬퍼하고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길 바란다. 이젠 다른 인생을 꿈꿔보길 바란다. 네가 또다시 나를 따라 나선다면 우린 이 과정을 반복하게 될 거야. 다시 마주치기 위해, 서로를 찾기 위해 의미 없이 세월을 버티며 고독 속에 몸을 웅크리고 침잠하겠지. 그렇게 기다리다 몇 번, 몇백 번을 재회하더라도 네가 나에게 처음 느끼는 감정은 안타깝게도 '살의'뿐이라는 걸 기억하거라. 다음은 다를 거라 기대하진 말거라. 네가 흔들리면 이번 생도 결국 허사가 돼. 단 하루, 단지 몇 시간의 재회를 위해 또 한 번 힘겹게 살아가게 될 거야.
가엾은 아나킨. 그 시절, 나는 너의 끝을 보지 않길 빌었고 너는 나의 끝에 함께하길 원했다. 애석하게도 그 결과가 이것이구나. 나는 그 운명을 거절할 능력이 부족하기에 이번에도 역시 너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사랑하는 아나킨. 이젠 행복해지렴. 그리고 늘 같은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감히 너의 행복을 빌도록 하마.
네가 나를 찾아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마지막으로 널 기다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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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