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생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반복재생됩니다.
Bitter sweet
S I N @Sin__JR
남자는 펜촉으로 몇 번 종이를 두드리다가 다른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과거에 벗어나기 위해서 정말로 이 글을 써서 세상에 내놓는 게 올바른 일일까. 입가를 매만지던 손을 내리고 다시 펜을 들어 글을 계속 이어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일이 마음에 걸려 현실과 가끔 혼동하신다고 하셨죠.”
“예.”
대답하고도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 들지 않아 오비완은 소파에 뻣뻣하게 기댄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불안 증세도 있으신 것 같고요. 과거의 일, 아니 그러니까 말씀을 빌려 말하자면 꿈이거나 전생과 비슷한 경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저 때문에 괴로운 인생을 살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음에도 말이죠? 그렇다면 그 꿈을 가상의 일로 만드는 일을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비완 씨는 직업이 소설가라고 하셨으니 마음을 풀어놓는 글로 쓴다던가 같은 행동으로요.”
“글로요?”
“예, 그렇게 하면 한결 나아지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의 상담 내용을 떠올리며 몰려오는 두통에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약통을 털어 알약을 손에 올리고 물컵의 물과 함께 삼켰다. 꿀꺽. 목 뒤로 넘어가는 감촉이 불쾌했다.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자신을 저주한다며 거친 목소리를 내는 제자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한번 생을 반복하면서도 너를 놓지 못하는 나를 보면 미련하다 할 텐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오비완은 제 옆에 쌓인 종이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봤다. 6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일들을 적절히 바꾸고 글로 쓰기에는 너무 길었다. 그래서 적어도 소설에서 결말을 바꾸기로 했다. 너는 악에 물들 뻔하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해내고 마음을 다잡고 영웅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는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여생을 보내는 그런 이야기로. 오비완은 아마도 아나킨이 가장 바랐을 끝을 적어나갔다. 후련한 마음과 함께 마지막 문장을 쓴 오비완은 종이 뭉치들을 바라보다가 자주 책을 내주던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신비한 세계와 박진감 넘치는 전투, 선택받은 자의 처절한 정의와 빛남에 매혹된 사람들은 홀린 듯이 책을 샀다. 오비완으로서는 자신을 털어낼 작품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이야기들에 책을 불티나게 팔렸고 베스트 셀러를 넘어 읽는 것이 필수가 되는 유행과도 같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돈이 썩어 넘치는구나.’
나가기만 하면 달라 붙어오는 기자들 때문에 오비완은 집에 틀어박혀 그동안 못 본 영화 따위들을 몰아 보고 있었다. 유명한 영화들을 다 보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고 그다음에 손을 댄 것은 빛을 보지 못한 영화들이었다. 누구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영화. 시큰둥하게 영화들을 훑어보던 오비완의 손이 멈췄다. 갈색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푸른 눈을 가진 익숙한 남자가 있었다.
급한 마음에 본 주연의 이름에 떡하니 적힌 아나킨 스카이워커라는 이름에 오비완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져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휴대폰을 켰다. 이 세상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아나킨도 살아가고 있었다니.
아나킨 스카이워커, 23세의 배우. 얼굴이 잘생긴 것은 화제였던 적이 있으나 히트한 작품이 없어서 묻혀가고 있다.
언급조차 적은 전생의 제 제자에 대한 글을 가만히 읽어내렸다. 전생의 너를 피워내지 못한 나 때문에 스러졌는데, 이번에도 너는 그렇게 스러지는구나. 오비완은 분명히 많은 사람이 아직 아나킨의 재능을 알지 못한다는 착잡한 마음과 동시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뿐일지도 모른다는 감정에 휘둘렸다. 그와 있으면 객관적일 수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순간 휴대폰이 부르르 울려 바닥에 떨어졌다. 금 간 액정 너머로 영화화에 관해서 물어오는 업계 사람의 연락에 금을 따라 손가락을 문질렀다. 나라면 이번 생의 너를 빛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전생이 자신이 들었다면 오만이라고 속삭였을 말을 무시하고 어디서 뵐까요? 라고 그렇게 답을 보냈다.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크게 터치하지 않는 원작자와 수월한 투자에 인기 베스트 셀러 스타워즈의 영화화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비완이 완고하게 버티는 부분이 있었다면 주인공 역의 캐스팅은 배우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버틴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황당한 주장이었으나, 아나킨이 찍은 여태까지의 작품 목록을 훑어보고 다들 수긍했다. 영화의 시나리오 제작과 감독 등 틀이 결정되고 주인공은 아나킨으로 캐스팅되었다.
- 이런 내 맘 모르고 너무해~ 너무해~♬
잠결에 울리는 핸드폰을 집기 위해 커다란 손이 탁상을 짚으며 이리저리 더듬거렸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자 잡히는 휴대폰을 열어 귀에 댔다. 이 시간에 전화 올 일이 없는데. 소속사 사장님의 번호에 일이라도 잡혔나 싶어 켜자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마, 너 대박 났어! 오디션 하나 봐라!”
“오디션이요?”
“그래, 스타워즈 주인공 역으로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원작자가 우겼다나 봐.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으니 한번 보러 오라더라. 할 거지? 안 하면 넌 진짜 답 없어!”
“아, 스타워즈요. ……음? 예? 스타워즈요? 지금 한창 유명한 그 스타워즈요!?”
“드디어 네가 고생한 대가를 받나 보다! 대박 나는 건 시간 문제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아나킨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소설책의 영화화 주인공을 자신이 연기한다니. 너무 충격적인 데다 말도 안 나오는 소식에 아나킨은 어버버 말을 고르다가 당장 보겠다고 확답을 내렸다. 재투성이의 남자가 유리로 된 구두를 신고, 신데렐라가 되는 순간이었다.
오디션도 쉽게 넘어가고 계약서를 쓰자 원작자인 벤에게서 연락이 왔다. 진행하기 이전에,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전해온 소식에 아나킨은 제 나름대로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옷과 머리카락에 뿌려지는 진한 향수에 자신도 모르게 절로 긴장해 손을 가볍게 풀었다. 만나러 가볼까.
예약제 카페였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엇하나 어설픈 구석이 없는 카페를 눈으로 훑고 직원이 안내해주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는 시나리오를 검수하고 있던 남자가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 씨.”
“아, 예. 반갑습니다……그러니까 벤 선생님?”
“그건 필명이고, 편하게 오비완으로 불러주셔도 괜찮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정말 좋아하던 소설이었는데, 제가 주인공 역을 맡는다니 기뻐서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네요.”
“감사합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오비완은 아나킨과 가벼운 악수 후에 조곤조곤 아나킨으로 연기할 때 중요한 부분, 몇 가지 중요한 사항 따위를 말했지만, 잔뜩 긴장한 아나킨의 귀에 들려올 리가 없었다. 아나킨이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고 익숙하다는 듯 피식 웃고 곱게 접은 종이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꿈 같은 일이라는 건 아시겠지만, 정말 중요한 사항이니 봉투 안에 종이에 적어두었습니다. 확인 부탁드릴게요.”
“죄, 죄송합니다.”
오비완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아나킨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팬이라고 하셨죠?”
“아, 네.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전에 읽어보고 바로 팬이 됐어요! 진짜로요! 립 서비스가 아니고…….”
“감사합니다. 그럼 가장 좋아했던 부분을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나킨 스카이워커 씨가 하는 연기는 상당히 기대되는 바가 있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요? 음, 큼큼. 당연하죠! 몇 번이고 혼자서 연습했었는걸요.지금 바로 할까요?”
“괜찮으시다면요.”
"……당신을 증오해. 진정 나를 사랑했다면 나를 죽였어야지."
분명히 배경은 따뜻하고 귀여운 장식이 가득한 카페였지만, 아나킨이 그 문장을 입에 올리자마자 주변에 용암이 흐르고 절망에 가까운 비명이 들려왔다. 오비완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몸을 뒤로 물리자 아나킨은 당황한 듯 표정을 풀고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 아니.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드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마도, 이런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혼자서 생각하다가 나온 거라……그게…….”
“아뇨. 훌륭합니다. 괜찮아요. 이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시 당신을 선택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다음에는 감독님께서 직접 접촉하실 테니, 저는 영화가 완성된 이후에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걱정스러운 시선을 하는 아나킨을 뒤로하고 안색이 새파래진 오비완은 카페를 뛰쳐나와 정처 없이 뛰었다. 아나킨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이 아나킨을 기만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모두가 우러러보는 별처럼 빛나게 만들고 싶은 욕심에 어쩔 수 없다며 자신 스스로 합리화했다.
아나킨은 촬영 내내 묘한 위화감이 자신을 감싼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사를 굳이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몸은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대사를 내뱉었다. 오히려 대본에 적힌 대사보다 본능적으로 바꿔서 한 대사가 채택되기도 하는 등, 정말 이 역은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역에서 결말 부를 제외하면 위화감을 전혀 못 느꼈다는 쪽이 맞겠다.
극심하게 이입한 것인지, 혹은 정말 자신이 주인공이 됐다고 느껴진 건지 저도 모르고 자신의 스승 역을 맡은 배우의 멱살을 연기 중에 합의 없이 틀어쥐기도 했던 터라 주의까지 받으면서 그 기분은 더 심해졌다. 이건 마치, 이미 겪어본 것 같은…….
“아나킨 씨, 마지막 장면 들어갑니다!”
“예.”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나킨은 애써 자신의 기억에서 아른거리는 오비완을 털어냈다. 아니, 그냥 위화감에 불과하겠지. 역에 과도하게 이입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짓누르는 기묘한 감각을 억누르고 결말을 연기하면서 든 생각은 이 영화를 대박일 것이라는 것과 한 사람이 빠진 것 같은 허탈함이었다.
* * *
“이번에 스타워즈가 이륙한 일들은 정말 놀랍죠.”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에 한순간에 진입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TV에서 떠드는 소리에 아나킨은 어찌할 줄 몰라 입꼬리를 씰룩였다. 어중간한 배우에서 슈퍼스타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출연료와 엄청난 인센티브, 그 외에 인터뷰 등으로 들어오는 수익에 아나킨은 평생을 번 돈의 몇백 배는 벌었을 거라고 장담했다. 어딜 가든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보면 감동해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시간제한을 받지 않은 신데렐라처럼 반짝이는 아나킨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바라봤다. 한번 와보라는 권유에도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오비완은 아나킨이 명예로운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가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의 남우주연상은 스타워즈에서 주인공 베이더 역을 맡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가장 뒤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에 묻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가장 빛나고 있는 아나킨을 바라보다가 손뼉을 쳤다. 너의 목소리는 그런 자그마한 무대를 넘어서서, 좀 더 온 세계의 마음에 울려 퍼질 테지. 자신이 만든 유리구두를 신고 손을 흔드는 다시는 재 같은 것을 뒤집어쓸 일이 없을 아나킨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너는 행복할 일만 남았구나.
상을 쓸어 담은 덕에 작게 관계자들로만 열린 파티의 초대장을 만지던 오비완은 차에 올라탔다. 간다면 분명 아나킨도 있을 텐데, 얼굴만 비추고 바로 나오자.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들어가자마자 아나킨은 다른 이들과의 인사를 서둘러 끝내고 자신에게 직진으로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며 어느 정도 두고 있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느낀 오비완은 그저 곤란함에 쓴 웃음을 지었다.
“어! 오비완씨! 파티에는 오셨네요!”
“빠지기 뭐한 것도 있고, 한 번쯤은 와야 할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지만……촬영장에서 한 번도 못 봬서 또 안 오시려나 생각했거든요. 그보다 촬영장에 안 오셔서 좀 서운했던 거 아세요? 그래도 한 번은 오시겠거니 했는데.”
“음, 제가 없어도 잘 만들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끼시는 분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요~ 싶지만, 선생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참, 영화는 보셨어요? 큼큼, 저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촬영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뇨, 아직 안 봤습니다.”
“네?!”
“뭔가 긴장이 돼버려서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나오는 거짓말에 오비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음. 그럼 저랑 같이 보러 가실래요?”
“사람들의 이목이 끌리지 않을까요. 곤란하실 텐데요.”
“변장하고 가면 되죠! 아니면 관 하나를 빌린다던가.”
그것참 잘도 그 외모가 변장에 가려지겠구나, 아나킨.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고 계속 졸라대는 아나킨에 오비완은 항복을 표시했다. 관련 안 되고 그냥 나가겠다고 한 게 누구더라. 누굴 탓하랴. 아직도 애착을 못 버린 자신의 잘못이었다. 오비완은 안 주머니에서 번호가 적힌 명함을 하나 꺼내 아나킨에게 건네주었다. 자신의 번호를 받아서 기쁘다는 표정이 얼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거참, 연기자라는 사람이 표정이 이렇게 드러나서야 원.
“그럼 언제로 잡을까요! 전 내일 아침 9시를 추천할게요. 지금 이야기하면 따로 관을 뺄 수도 있을 거고요.”
“좋습니다. 그럼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는 대로 연락해주세요.”
“당연하죠! 바로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긍정의 표시와 함께 감기 기운을 핑계로 빨리 나온 파티장의 밖에서 휴대폰의 깨진 금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계속 빛나고 있는 네가 행복하다면 뭐든 좋다. 이 모든 게 기만이 되거나, 네가 나를 쳐낸다고 해도 나는 그저 그걸로 만족해. 차의 시대에 등을 기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오비완은 영화관 앞에서 아나킨을 기다리며 얼어붙은 손을 코트에 밀어 넣었다. 차근차근 눈이 내리며 소복이 쌓이는 광경에 고민하다가 살짝 발자국 하나를 찍었을 즘 저 멀리서 아나킨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저러다가 넘어질 텐데 용케도 안 넘어지고 뛰어온다며 혀를 차던 오비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아나킨에게 다가갔다.
“아, 오비완씨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와서요. 예약한 관이 몇 관이라고 하셨죠?”
“8관이요. 제일 위층이니 엘리베이터로 바로 타고 가면 될 것 같아요.”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오비완은 손을 뻗어 아나킨의 머리카락이나 옷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청회색 눈으로 흘겨보면 아나킨은 그때마다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로 열심히 거리를 두는 것과는 반대로 그의 시선이나 손짓은 자신을 마치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렇게 눈을 털어내는 행동도 본인은 인지를 못 하고 있을 텐데도, 아나킨은 그에게서 애정어린 손길을 받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일부러 그에게 더 치대는 행동을 하면 예의 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그렇게 떼를 쓰면 오비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승낙을 해왔다. 자신을 가장 빛나게 해주면서 누구보다 다정한 손길을 내미는 남자였기에, 아나킨은 자연스럽게 이 남자의 옆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팝콘이랑 콜라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다지 즐기지 않아서요.”
“전 필요한데!”
“……제가 사 올 테니 기다리시겠습니까?”
“엥? 아니, 제가 가도 되는데요!?”
“다녀올게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쌩하니 아나킨을 영화관에 홀로 남겨둔 오비완은 매점에서 팝콘 종류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나킨의 입맛을 모르겠다! 그 체격 있는 애한테 풀떼기만 먹인 과거의 업보인가. 게다가 무슨 놈의 팝콘 종류가 이리도 많단 말인가. 인상을 쓰고 팝콘들을 노려보던 오비완은 특단의 조치로 4종류 모두 사기로 했다. 그나마 반반으로 담을 수 있는 패키지가 있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며, 음료수와 함께 들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서 쓴 경험담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그런 내용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변화되어 영화로 만들어졌다니. 보다가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일부러 미루고 있었는데 떼를 쓰는 아나킨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속아 넘어준 꼴이라니. 과거에는 왜 좀 더 이렇게 대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미안함이 몰려와 오비완은 미간을 꾹 눌렀다. 괜찮아. 지금부터라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주면 그만이다.
“우왓, 이게 뭐예요? 종류별로 다 있네?!”
“아나킨 씨가 무얼 좋아하시는지 저는 모르니까요. 고민하다가 전부 사 왔습니다.”
“아하하. 이렇게까지는 많이 못 먹는데. 큼큼, 뭐 상관없겠죠! 잘 먹겠습니다!”
오비완에게서 팝콘 통과 음료수를 건네받은 아나킨이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영화가 시작한다는 핑계를 대며 아나킨은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나의 이야기는 어떨까. 떨리는 손으로 음료수통을 만지작거렸다. 꿈에서 봤던 것 같은 장면들이 펼쳐졌다가 자신의 손으로 바뀐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반격을 가하지 않고 그의 칼에 무너졌다.
“어쩌면 네 삶에는 내가 필요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구나.”
“스승님.”
“내가 없는 삶이라면, 너는 행복해질 수 있단다. 반드시 우주를 구하고 행복해져야한다.”
좀 더 옳은 길로 갈 수 있다고 말하며 스러진 영화 속의 제 스승을 바라보며, 다시 빛을 붙잡고 어둠에서 나온 영화 속의 아나킨을 오비완은 희미하게 웃으며 바라봤다. 내가 바라는 너는 저런 모습이었구나. 시리도록 흐려지는 기분에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손을 강하게 붙들어오는 체온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쩌면 화난 것 같기도 한- 묵묵한 얼굴로 영화를 보는 아나킨에 오비완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영화 화면에 시선을 옮겼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말하며 우주를 구했다.
영화 속의 영웅인 그는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아나킨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네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 끝과 함께 올라가는 크레딧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나킨은 작게 숨을 들이쉬고 오비완을 바라봤다.
“오비완은 죽고 아나킨은 행복해지고. 이런 게 정말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요?”
“……?”
“당신이 바라는 내 행복이 이런 거였어요? 당신을 죽이고도 우주를 구한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거?”
“그게 무슨…….”
“날 똑바로 봐요, 오비완. 나만 없으면 너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진심이냐고요. 그냥, 계속 잘해줬으면 되는 거잖아요. 같이 임무 나가고, 가끔 대련도 하면서……당신이 나를 아낀다고 그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였잖아요. 지금처럼만 대해줬어도 나는 당신을 증오하지 않았을 텐데. 그게 어째서 이런 이야기로 넘어가야 해피엔딩인 건데요!!”
아나킨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괴로움에 잠식당한 그 파란 눈을 마주했을 때, 오비완은 그가 자신과 60년의 긴 인연을 가졌던 그 아나킨 스카이워커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색이 새파래졌다. 밤의 마법이 풀리고, 네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오비완이 몸을 뒤로 물리자 아나킨은 손을 잡아당겨 오비완을 끌어안았다. 어깨의 와이셔츠가 아나킨의 눈물로 젖어가고 있었다.
“울지마렴.”
“…….”
“너를 슬프게 한 건, 다른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 기준으로 네가 행복하길 바란 탐욕스러운 나구나.”
“…….”
“미안하다. 너를 울리고 싶었던 게 아니야.”
“이런 거 다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든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요. 이제는 명예나 자만에 안 빠질 테니까, 절 버리지 마세요. 버리지 말아줘요…….”
거의 아나킨의 품에 파묻히듯 한 오비완은 아나킨의 등을 천천히 부드럽게 토닥여내렸다. 유리구두는 아무래도 아나킨에게 부담이었던 걸까. 그를 불안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불안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아나킨에게 확신을 줄 필요가 있었다. 어떨까. 다음 기회에는 진심으로 「널 아끼고 좋아한단다.」라고 말해주는 수밖에. 덩치만 큰 제 제자의 볼에 머리를 가볍게 비볐다. 아나킨을 부둥켜안은 채로 올라가는 크레딧을 바라보는 오비완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