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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nch Drunk Love
산 사 @sansa_wars
“합시다, 결혼.”
“네?!?!?!”
아나킨의 삑사리 난 비명이 조용한 카페에 울려 퍼졌다. 아나킨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끔따끔 아나킨의 볼을 찔렀다. 자신도 모르게 카페 테이블을 내려친 채 일어나버린 아나킨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에 앉았다. 정작 그 모든 것의 원인인 충격선언을 내뱉은 당사자는 커피를 홀짝인 채 변함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지,지,진짜로요? 진짜?”
“네. 결혼하자구요.”
“가,가,가,갑자기? 이렇게?”
아나킨이 횡설수설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오비완은 커피 잔을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무서운 기세에 아나킨은 입을 합 다물었다.
“하자는 대로 해드릴게요, 스카이워커 씨. 결혼 하자면서요. 지금까지 온갖 협박은 다 하셨으면서 이제 와서 결혼하기 싫습니까? 그럼 저야 좋….”
“아니아니아니요!! 결혼하고 싶어요! 너무 좋은데?”
하…. 진짜 때릴까? 오비완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겨우 삼키며 비즈니스를 위한 표정을 내보였다.
“날 잡죠. 빠를수록 좋으니까.”
* * *
망할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오비완을 쫓아다닌 지 벌써 세 달이 넘었다. 오비완이 처음 아나킨을 만난 것은 흔하디흔한 상류층의 사교 모임에서였다. 오비완이 아버지와 형의 성화를 못 이겨 얼굴을 내비추기 위해 겨우 참석했던 모임이었다. 그 곳에는 요즘 부상하고 있다는 스카이워커 가문의 외동아들도 와 있었다. 그는 온갖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하하 호호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선 여자들은 벌써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그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몸을 잔뜩 배배 꼬고 있었다.
스카이워커. 정계면 정계, 재계면 재계.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모든 분야를 삼키고 있는 가문이다. 10여 년 전에 갑자기 나타나더니 무서운 속도로 다른 회사들을 인수합병해오며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재계에 유구한 역사를 가진 케노비 가문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으나, 스카이워커 가문의 외동아들이 셀럽 뺨치는 얼굴과 피지컬을 가졌다는 소문은 오비완의 귀에도 들어왔다. 스카이워커 회장이 아들이 그렇게 싸고돈다더니, 왜 그러는지 알만한 얼굴이었다. 저 얼굴에 흠집이라도 나면 내가 부모라도 피눈물 흘리겠다. 오비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비완은 본래 자신의 장벽 밖에 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오비완은 그 모임에서도 주최자에게 얼굴을 잠깐 비춘 뒤 평소처럼 사람들과 동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혼자 차를 홀짝이며 패드로 전자책을 보고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즐기며 열심히 독서를 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레 그림자가 지기에 오비완은 눈살을 찌푸리며 앉아있는 자세를 바꾸었다. 그래도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았다. 오비완은 그제야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에….」
오비완의 눈동자에 비친 그 얼굴은 아까 여자들을 휩쓸고 다니며 실컷 인기를 즐기던 남자였다. 스카이워커의 외동아들. 오비완은 순간 당황해 잠시 비켜달라고 매섭게 쏘아붙이려 했던 계획조차 잊은 채 입을 헤 벌리고 그 잘생긴 얼굴을 감상해 버렸다. 오비완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그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움직이더니, 곧 환하게 웃으며 오비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라고 해요, 그 쪽 이름은?」
오비완은 두고두고 그 순간을 후회했다. 그 때 오비완은 그렇게 넋 나간 표정을 보여줘선 안됐다. 그렇게 쉽게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는데!
「오, 오비완 케노비입니다.」
그렇게 둘의 악연은 시작됐다.
그래, 그 순간은 좋았다. 그 모임에서 외로이 책을 읽고 있던 오비완에게 아나킨이 말동무가 되어준 것 까지는 정말 좋았다. 오비완은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좋은 친구이자 인맥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한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당장 아버지께 ‘저 스카이워커랑 친해졌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랑을 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 스카이워커는 아직 대학 졸업도 못한 창창한 20대 청년이고 자신은 회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일요일 밤만 되면 ‘출근하기 싫다!’를 외치며 울며 잠드는 못된 어른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였기에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다며 자랑할 참이었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현관문을 여는 오비완을 기다린 것은 다름 아닌 굳은 표정을 한 채 수화기를 들고 잔뜩 굽실거리며 연신 ‘네, 알겠습니다.를 반복하는 자신의 아버지와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형이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요?」
「오비완, 너 아나킨 스카이워커랑 무슨 일 있었니?」
아버지에 물음에 오비완은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30분 전 까지만 해도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묻긴 했는데, 그게 일이라면 일인가…? 오비완은 다음에 할 말을 최대한 조심히 골라 겨우겨우 대답을 내뱉었다.
「모임에서 서로 인사를 하긴 했는데….」
「스카이워커 측에서 널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 하더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이쪽이 하나 둘씩 이 쪽 회사 인수합병 하고 있는 거 알지? 네가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는다.」
방금까지 아나킨이랑 웃으면서 대화하다 왔는데? 오비완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아나킨과 개인 연락처까지 교환했는데. 오비완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으나, 그 순간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다.
[연락 받았죠? 내일 저녁 시간 비워놔요.
-Anakin Skywalker-]
오비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그래, 뭐 좋은 일일수도 있으니까.
* * *
아나킨 스카이워커와의 저녁 식사를 끝내고 오비완은 끝끝내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술집에 가 혼자서 술을 홀짝였다. 스테이크를 썰으면서 들었던 한마디가 너무도 충격적인 탓이었다.
「…그래서 결혼만 해주신다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죠.」
이게 과연 대학 졸업도 안 한 새파랗게 어린 남자애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그것도 그 말을 듣는 상대가 아버지와 형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겨우겨우 삶을 이어나가는 30대의 직장인일 때? 오비완은 스테이크를 썰던 칼을 떨어뜨릴 뻔 했으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나킨에게 되물었다.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나킨은 차갑게 굳은 오비완의 표정을 보면서도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케노비 가문을 엿 먹이고 싶은 건가? 케노비 가의 차남을 새파랗게 어린 남자애와 결혼시킴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보여준다, 뭐 이런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오비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비완은 체할 것 같은 심정으로 식사를 겨우 끝냈다. 그 와중에도 아나킨은 매우 신나보였다. 룰루랄라 식사를 끝내더니 오늘은 제가 사겠다고 하며 황금빛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고는 가버렸다. 오비완은 집에서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에게 ‘나 24살 남자애랑 결혼해야 될 것 같아요.’ 따위의 말을 결코 꺼낼 수 없어 그대로 친구의 바로 직행했다.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문자가 왔지만,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 술을 연거푸 들이마시며 핸드폰을 뒤집을 뿐이었다.
* * *
그리고 오늘, 이렇게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마주보고 앉아있자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자연스레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오비완은 애써 웃으며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퇴근하자마자 봐야하는 얼굴이 이 얼굴이라니. 믿고 싶지 않다.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눈치 없이 로맨틱했다. 오비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메뉴를 골랐다. 아나킨은 그런 오비완을 흘긋 쳐다보더니 말을 건넸다.
“오늘 뭐했어요?”
“일했습니다.”
“아.”
짧은 대화가 끝나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오비완은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괸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나킨이 꽤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나킨은 계속해서 무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숨을 몇 번 고르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주말에 뭐해요?”
“일합니다.”
“아.”
저런 건 왜 묻는지. 오비완은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엎고 싶었지만, 길거리에 내몰린 채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음을 터뜨릴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며 겨우 분노를 억눌렀다. 아나킨도 오비완의 가라앉은 기분을 느꼈는지 더 이상 별 말 하지 않고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화려한 테이블 위에서 아름다운 장식용 초가 타오르고 있었지만, 아나킨과 오비완 사이에는 차가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오비완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른 채 식사를 마쳤다. 그 와중에 아나킨은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까지 먹으며 속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비완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 아나킨이 숟가락을 내려놓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어,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저 차 끌고 왔습니다.”
“아.”
차키를 든 채 급하게 일어난 아나킨의 손이 허공에 맴돌았다. 오비완은 아나킨 앞을 쌩하니 카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엔 아나킨이 샀으니 이번엔 제가 계산을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행동엔 1원이라도 빚지고 싶지 않다는 오비완의 심정이 담겨 있었다. 아나킨도 오비완을 쫓아 급하게 레스토랑에서 빠져나왔지만,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도로 저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오비완의 차 뒤꽁무니뿐이었다.
* * *
[액션이 좋아요 스릴러가 좋아요?
-Anakin Skywalker-]
하. 오비완의 한숨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이건 또 어떤 종류의 신종 협박인가. 오비완은 최근 아나킨의 시답잖은 문자 세례에 일일이 답해주느라 부쩍 예민해진 상태였다. 문자의 내용은 주로 오늘 뭐했냐, 내일 뭐하냐,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 등등 오비완을 귀찮게 하기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답장을 안 하면 아나킨의 화를 돋울 것만 같은, 한마디로 말해 쓰잘데기 없는 내용이었다.
[둘 다 안 좋아합니다.
-Obi-Wan Kenobi-]
[아
-Anakin Skywalker]
오비완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뒤집었다. 그러나 곧바로 진동이 울려 오비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주말에 시간 비워놔요. 영화 봐요.
-Anakin Skywalker-]
“아아악!”
오비완이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주말에까지 아나킨을 봐야한다니. 오비완은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하여 오비완은 끝끝내 영화관 앞에 서있게 된 것이다. 목폴라티에 코트를 걸친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텅 빈 눈으로 서있는 오비완에게 곧 아나킨이 다가왔다. 싱글벙글 웃으며 티켓을 손에 쥔 채였다. 오비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아나킨이 오비완의 손을 덥석 잡은 채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액션도 스릴러도 안 좋아한다기에 로맨스 영화 예매했어요. 괜찮죠?”
오비완은 아니요, 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아나킨의 활짝 웃는 얼굴에 말을 삼켜야 했다. 아나킨은 오비완을 잠깐 세워두더니 팝콘을 사러 사라졌다. 곧 나타난 아나킨의 품에는 팝콘과 콜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빨대 두 개를 한 콜라에 꽂는 아나킨의 행동에 오비완은 기가 차서 말했다.
“하나만 샀어요?”
“네?”
“빨대 두 개로 콜라 하나 먹자구요?”
“네. 문제 있어요?”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눈을 깜빡이는 아나킨에 오비완은 그저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뱉어야 했다. 오비완이 대답하지 않자 아나킨은 콧노래를 부르며 오비완의 손을 붙잡고 관으로 입장했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품에 팝콘을 안긴 채 몸을 오비완 쪽을 잔뜩 숙이고 팝콘을 집어먹었다. 자신의 어깨에 몸을 기대오는 아나킨 때문에 오비완은 상영시간 내내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비완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생각 외로 외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비완은 스크린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밀린 업무를 떠올렸다. 그래, 집에 가서 일이나 하는 거야. 오비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영화가 끝나 있었다. 상영관에 불이 켜지자마자 오비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나킨도 빈 팝콘 통을 들고 오비완을 쫄래쫄래 쫓아왔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아나킨이 자연스레 오비완의 팔에 팔짱을 끼워왔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요.”
그렇게 말하는 아나킨의 표정이 너무도 해맑아서, 오비완은 평소처럼 싫어요, 라고 차갑게 말할 수가 없었다. 대신 오비완은 뻣뻣하게 팔짱을 풀고 핸드폰을 가리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업무가 있어서 일찍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평소 같았으면 아, 하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어야 할 아나킨이었지만, 아나킨은 오비완의 말에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나킨이 말했다. 오비완은 뒤를 돌아 걷다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아나킨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었다.
* * *
“저 이사님, 밑에서 아나킨 스카이워커씨가 기다리고 계신대요.”
책상에 엎드린 채 잠시 쉬고 있던 오비완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나킨이 기어코 회사까지? 오비완은 의자에 걸쳐놓은 재킷을 집어들으며 비서에게 말했다.
“올라오지 말고 1층에서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네.”
오비완은 피곤한 눈을 양손으로 문질렀다. 근 몇 주간 아나킨 스카이워커에게 시달리느라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툭하면 저녁식사에 끌고 가질 않나, 주말마다 자기를 만나달라고 생떼를 부리질 않나. 안타깝게도 오비완은 그런 아나킨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라 순순히 그를 따라주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카페에서 오비완이 아나킨에게 ‘합시다, 결혼.’이라고 포기 아닌 포기를 한 그 날 이후로, 아나킨의 수작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아나킨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에게 휘말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만남이 잦아질수록 아나킨이 해달라는 것에 점점 더 유하게 반응하게 되고, 오히려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네게 돼버린다. 오비완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오비완은 로비 데스크에 기댄 채 서있는,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미청년을 볼 수 있었다.
“아나킨씨.”
“오비완!”
오비완이 다가가자 아나킨은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든 무언가를 오비완에게 내밀었다. 오비완은 미간을 찡그린 채 물건을 받아들었다.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아나킨을 쳐다보자 아나킨은 눈을 휘어가며 신나게 조잘댔다.
“도시락 쌌어요! 제가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편인데, 요리는 조금 못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될 거에요. 오비완이 저번에 샌드위치 먹으면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샌드위치 만들어 봤는데….”
“아나킨씨.”
“네?”
“아나킨씨. 저희가 결혼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네?”
오비완은 데스크에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짜증이 난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자 아나킨이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나킨씨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차피 결혼할 테니까, 저한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노력하실 필요 없다구요. 어차피 서로 좋아서 하는 결혼이 아니잖습니까.”
오비완은 지금껏 맘에 담아놓았던 말들을 쏟아내었다. 한껏 쏘아붙인 후 오비완은 괜히 후회가 되어 얼른 등을 돌려 아나킨의 시야에서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아나킨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오비완의 발목을 잡았다.
“아닌데요.”
오비완은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오비완을 대신해, 아나킨이 오비완을 추월해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앞을 막아서고 말했다.
“좋아서 하는 결혼 맞는데요.”
“아나킨씨.”
“미안해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서 제가 아버지께 결혼시켜달라고 억지 부렸어요. 근데 저는 한순간도 진심 아니었던 적 없었거든요. 어차피 하게 될 결혼 조금이라도 오비완한테 점수 따고 싶어서 최대한 노력해봤는데 오비완이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아무리 쓰러져도 전 좋아요. 오비완한테 계속 수작 부릴 거라구요!”
오비완은 너무도 당황했다. 아나킨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다 못해 마지막 문장을 내뱉을 때쯤은 거의 소리를 지르는 것과 비슷한 크기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오비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1층에 있는 회사 직원 전체가 전부 아나킨과 오비완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비완은 겨우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좋아요?”
“네…. 처음 볼 때부터요.”
“그래서 저를 그렇게 괴롭힌 거예요?”
“괴롭힌 게 아니라…!”
“30대 아저씨가 좋아서?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장난 아니에요.”
오비완이 몇 번째 한숨인지 모르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나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결혼 취소할 거예요?”
오비완은 데스크에 놓고 가려 했던 아나킨의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
“아나킨씨.”
“…”
“결혼하기 전에 연애부터 제대로 해봅시다.”
아나킨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오비완이 얼굴을 붉힌 채로 겨우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 망할 협박 같은 플러팅 좀 그만 하고, 제대로 된 연애부터 해보자구요. 아나킨씨.”
“네,네,네. 당연하죠. 오비완. 제가 진짜 좋아해요.”
“저는 아직 아나킨씨 안 좋아합니다.”
“제가 이제 좋아하게 만들 거예요. 다시, 다시 시작할게요. 처음부터.”
좋아해요. 아나킨이 오비완의 뺨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선 재빨리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오비완은 도시락을 든 채로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겨우 파악한 오비완이 뽀뽀당한 뺨을 소매로 벅벅 닦아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