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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줄게
딛 투 @R2d2210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심장이 막 두근대고 잠은 잘 수가 없어요. 머리도 아파요, 이런 걸 대체 왜 먹는 거예요? 이게 다 선생님 때문이야! 어린 학생의 말도 안 되는 투정에 덩달아 머릿골치가 아파오는 오비완이다. 덩치만 컸지 애는 애다. 난 네가 수업을 빼먹으려고 핑계를 대는 줄 알았지 뭐니. 평온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두 눈에 하얗게 쌍심지를 켜는 아이는 지독할만치 오랜 인연, 한때지만 전생의 연인이었던 아이다. 억울해 죽겠다며 우는 소릴 하는 아이의 머리 위로 복잡한 심경을 담아 흰 시트를 던지고 명령했다. 얌전히 한숨 자고 일어나렴. 잠이 안 오는 데 어떻게 자라는 말이에요? 반복되는 투정을 곱게 묵살하고서야 비로소 업무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와― 선생님 손끝이 둥글둥글 예뻐요.”
어느새 옆에 다가와 선 아이가 마치 제 것인 듯 손을 당겨 어루만지기 전까진 말이다.
아이는 침묵을 두려워했다. 지금처럼 자신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올려보는 것 또한 그런 종류에 해당했다. 머쓱한 표정으로 반걸음 물러서는 아이에게서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아나킨. 상담이 필요하면 내가 아니라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야지.”
“걘 아무것도 몰라요.”
그제야 눈치를 보겠다고 아차 싶은 얼굴로 담임이요… 말을 덧붙인다. 평소처럼 무시로 일관해야하건만 비죽 튀어나온 입술이, 섧은 눈망울이 오비완의 마음을 자꾸만 켕기게 만들었다. 하여간 내 얼굴에 약하다니까! 웃던 그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자조했다.
“뭐가 그리 고민인건데.”
“…짝사랑이요….”
실수했구나 싶었다. 버릇처럼 안경을 추켜올리고 싶은걸 꾹 참으며 다시 책상 앞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꽃만 봐도 가슴 뛸 나이지.”
“꽃 좋아하세요?”
이상한 곳으로 의도가 튀어나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쩜 변한 게 없는지. 그런 말이 아니지 않느냐! 버럭하고픈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스스로를 달래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니까.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니? 예쁘고 향도 좋고. 글쎄다… 일단 화려하잖아. 꿀이 있으니 누군가의 배도 채워줄거고- ”
이렇게 횡설수설 잡다한 말을 늘어놓는 건 원래 성격과 거리가 멀다는 거 스스로도 잘 안다. 사람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네, 그렇죠. 대답하는 저놈이! 입술만 뚫어져라 보고 있지 않았어도 이럴 일 없었겠지.
“마치 저 같네요.”
“뭐?”
“설명하신 꽃이요. 저 같다고요. 예쁘고 화려하잖아요? 향은 잘 모르겠지만 이사람 저사람 주변에 꼬이는 걸 보면 아마 나쁘진 않나봐요.”
“…과연 자기애가 넘치는구나.”
쓸데없는 잡담이 끝났으면 가서 눕던지 교실로 돌아가려무나. 여긴 보육원이 아니야. 길 잃은 아일 상담해줄 여유 따윈 없단 말이다. 나름 간절한 부탁에 그제야 한 뼘 물러나 앉는 녀석은 또 그 작은 머리로 뭘 고민 중인지 한참을 말이 없더랬다. 타닥타닥 키보드 눌리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리며 막 작업에 몰입 될 쯤에서야 다시 입을 여는 아이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시무룩했다.
“말라버리면 처치곤란이겠죠? 보기 싫잖아요.”
하여간 십대라든지, 그것도 성년을 목전에 둔 아이들이란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어른의 몸이면서 여전히 어린 사고는 쉬운 말을 곱씹고, 의미를 부여하고, 판단을 내린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대개 부정적인 결론을 진실이라 믿는 공통점이 속칭 어른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다. 비단 이번 생의 경험으로만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으니 이것 또한 타당하다 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군, 완전히 흐트러진 집중력을 긁어모아 모니터에 집중했다. '죄송해요 일 하시는데' 라는 사과까지 듣고 나니 이젠 머릿속이 온통 아나킨이다. 어쩌면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랬을지 모를 일이지. 언제쯤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네가 아닐 수 있을까?
“예쁘게 말려서 책 사이에 끼워두겠지. 네 앞에 놓인 그 책엔 코스모스가, 그 옆에 꽂힌 책엔 프리지아가 들어있단다. 의심되면 직접 열어봐도 좋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요점은-
“요점은, 뭐 그리 다를 게 있겠느냐 라는 거다. 그건 이미 꽃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넌 꽃보다 소중하거든? 그래, 내 학생들 중 하나인데 잘 모셔야지. 몇 없는 양호실 단골이기도 하고. 어째 분한 마음에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자 바람 구르는 소리 같은 웃음이 까르르 터져 나왔다. 네 녀석이 민망할 게 무어야? 숨고 싶은 건 나라고!
“제가 민망할 때 웃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모를 수가 없지. 내가 모를 수가 없지. 그러나 더 이상 불필요한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다. 검지로 출입구를 가리키며 축객령을 내리자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면서요- 라는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꼬우면 이사장이라도 되든지 말든지 공부 잘하고 돈 많이 벌어서 네 학교를 차리시던지 라고 답해주니 이번엔 속물이란다. 어른은 다 그래!
“돈 많이 벌어야겠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수업 다 마치면 다시 올게요! 전혀 반갑지 않은 인사를 끝으로 이곳은 비로소 평화를 찾게 되었다. 갑작스런 소란에 이어 단번에 가라앉는 정적이다. 오비완은 마른 얼굴을 쓸었다. 정말이지 몸에서 힘이 주욱 빠지는 기분이다. 같은 아일 두 번이나 가르치게 되다니. 만일 이게 누군가의 뜻이라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상념을 가라앉히며 마음을 다잡기가 무섭게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고 간 커다간 상의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잇새로 저절로 욕이 새었다. 바깥 날씨가 어땠더라? 젠장, 내가 너 때문에 진짜…!
“아나킨! 이거 놓고 갔, ”
문을 열자마자 넘어질 뻔한 몸이 급하게 들려 올려졌다. 그리고 집채처럼 덮쳐오는 온기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것 같다. 눌러오는 악력에 비해 부드럽기만 한 허릴 감싼 손이, 그 모든 게 의아할 때쯤 입술에 닿은 것을 인식하고 아- 야트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망설임없이 파고드는 혀와 그 질척함을 감내하며 휘청이는 몸을 버티고 버텼다. 그린 듯 잘난 코가 엉망으로 부딪혀왔다. 이어 뺨과 목을 스쳐 내려가면서 더운 한숨이 닿기 시작했다. 둥글게 쪼아오는 간지러운 입맞춤에 몸은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며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어떻게 참지.”
선생님 나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 사이에 딴사람 생기면 진짜 가만 안 둬. 몇 달, 아니 몇 주도 안 남은 거 알고 있죠? 나 이런 말 쉽게 하는 사람 아니에요. 아무한테도 이런 말 해본 적 없어요. 맹세해요. 입술을 훔친 건 본인이면서 잔뜩 억울한 칭얼거림에 오비완은 완벽하게 말을 잃고 말았지만, 정신을 차리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차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그만하라는 말이 타인의 입을 통해 울리는 건 묘한 경험이다. 밀어도 밀리지 않는 넓은 가슴과 어깨가. 이미 머리 위로 훌쩍 커버린 장신의 몸이 그제야 두려워졌다.
“…이대로 더 하면 안 되는 거죠?”
“이, 정신 나간 놈이?”
“악! 아, 왜 때리고 그래요! 말로 하면 될 걸 맨날 손부터 쓰고 난리일… 선생님? 왜 이렇게….”
제발 나가달라 죽도록 밀어도 기어코 들어와 문을 닫는다. 푹 꺼진 고개를 따라 몸을 숙이며 확인하고 손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모든 기력을 쏟은 기분이다. 제발 좀 놔줘… 볼품없이 떨며 애원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툭 내려지는 손목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죄송해요 선생님.”
“가라. 그냥 가 아나킨.”
“절… 무서워하실 줄 몰랐어요.”
어안이 벙벙한 듯. 얼빠진 얼굴을 흘기며 그저 손만 저었다. 무서운 게 아니야. 익숙함에 들뜬 내가 싫은 거지.
“…이런 상황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니?”
“다신 이러지 않을게요. 다신, 말 잘 들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에 얄궂게 터져 나오는 눈물이 뺨을 따라 발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이제는 차마 어깨조차 닿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손끝이 가엾고 사랑스러워 그렇게 휘청였다. 좀처럼 멎지 않아 그렇게 한참을 마주 서서. 이러면 마치 씻겨 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울었다.
* * *
그 일이 있은 후로 졸업식까지 남은 약 삼 주 전이었나.
잠시 소원했던 아이가 다시 제 앞에 찾아와 하늘과 땅과 별과 우주를 걸며 청혼한 것은 조용하던 오비완의 인생을 다시 한 번 흔들어놓은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