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재생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반복재생됩니다.

Misfire - Queen
00:00 / 00:00

 헤테로 인 더 트랩 

 스 텡   @obsssdwith  

   오비완 집의 초인종이 울리기 전까지 아나킨은 횡재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세 시간 전, 아나킨은 ‘배관 수리 관련해서 조금 큰 공사를 맡길 일이 있는데 개인 사정상 많은 인원을 부르고 싶지는 않고 와서 견적을 봐줄 수 있겠느냐’ 는 연락을 받았다. “주로 혼자 일한다고 들었어요.” 주문 내용도 내용이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와 깔끔한 발음은 쉬운 성격은 절대 아니겠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아나킨은 ‘제 실력이 끝내준다는 말도 들으셨나요?’ 라고 너스레를 떠는 말은 넣어두었다. 런던 외곽의 주소를 받아 적고 아나킨은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한 시간 내로 가겠습니다.”

 

   주소를 입력하니 공터 가운데를 가리키기에 지도가 업데이트가 안 됐나 생각하며 아나킨이 밴을 몰아 도착한 곳에는, 높은 담 안쪽으로 공원처럼 보이는 넓은 정원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 난 길 끝에 삼층 저택이 서있었다. 열린 정문으로 들어가 정원을 지나 현관 앞에 도착해 또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집주인이 문을 열어준다. 가르마를 타 빗은 단정한 금발과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근 주름 하나 없는 셔츠는 아나킨이 전화 통화를 통해 처음 받은 인상이 단지 느낌이 아님을 입증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회색빛이 도는 청안이 반짝이는 얼굴은 유순해 보이기도 한다. 피부는 희고 매끈하고, 잘 다듬어진 금색 수염이 윗입술과 턱을 가리고 있다. “들어오세요.” 고객이 그를 집 안으로 들이며 용건을 말한다. “이 집은 보다시피, 이 건물 자체가 오래된 골동품입니다. 전쟁 때 폭격에도 살아남았으니까. 몇 차례 보수를 거쳤지만 이전 주인들이, 사용하는 데 불편만 없다면 건물의 기초적인 시설을 관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지요. 하지만 나는 로마시대 유물과 나란히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할 것 같은 하수관을 계속 쓰고 싶지는 않거든요.”

 

   저택의 규모와 한눈에도 잘 관리되고 있는 그럴싸한 내부 풍경도 그렇고, 아나킨은 이 고객이 잉글랜드 북쪽 지방이나 스코틀랜드의 귀족 가문 출신일까 생각했다. 아나킨 그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가정부였던 그의 어머니가 소위 정통 귀족 가문에 고용되어 그들의 집에서 일했던 까닭에 아나킨은 그런 ‘고귀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투나 발음, 태도가 대체로 어떤지 잘 알았다. 그의 이번 고객은 고급스러운 발음을 구사하지는 않으나 말하는 태도와 어조, 말의 높낮이가 아나킨이 이제까지 봐왔던 귀족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타고난 것처럼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럽다. 다만 태도와 말투가 근엄하면서도, 신기하게 천박하지 않으면서 어딘지 비꼬는 느낌이 있었다. 고객이 그의 가슴 쪽을 눈짓하더니 물었다. “내가 당신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요? 한동안 거의 하루 종일 볼 텐데 계속 ‘이봐요’나 ‘저기요’로 부를 수는 없으니까.” 아나킨은 회사에 속한 보통의 배관수리공들과는 달리 명찰 같은 것을 달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양해를 담은 정중한 표정과 목소리로 “제 이름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아나킨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고객님(sir).” 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의 ‘고객님’은 가볍게 미간을 찡그리며 제지하는 손짓을 해보인다. “나는 오비완 케노비입니다. 그냥 오비완이라고 불러요 아나킨.” 아나킨은 정중한 미소를 머금고 “알겠습니다, 오비완.” 이라고 답했다.

 

   “말했지만, 이 집 전체의 배관을 교체하려는 겁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사용인들도 있고 필요하다면 또 따로 사람을 구해서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공사할 환경을 만들어주도록 하지요. 그러니 본격적인 작업은 가능한 한 당신 혼자 해야 하고, 과정 중에 자세한 사항은 나에게 계속 묻고 진행 상황에 관해 보고해야 합니다. 당신이 공사를 맡을 의사가 있다면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지요.”

   “보아하니, 제가 아니면 달리 적임자를 구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격식을 약간 벗어난 대답에 팔짱을 낀 오비완이 아나킨을 향해 눈을 흘긴다. “그 대답은 ‘예(Yes)’인가요?” 아나킨은 오비완이 그를 향해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입매를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정중한 태도로 답했다. “일단 그런 것 같네요.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들지 견적을 내봐야 더 확실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집의 설계도를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전에 집 전체를 둘러보는 건……” 그 말에 오비완이 안내하겠다는 듯이 손짓을 한다.

   그 후 한 시간 넘게 아나킨은 오비완 뒤를 따라 1층의 부엌과 큰 욕실, 2층의 침실에 딸린 욕실과 화장실, 나머지 크고 작은 방들에 딸린 수도 시설을 훑어보았다. 오비완은 잘 사용하지도 않는 1층의 큰 욕실과 호화로운 부엌을 관리하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며 규모와 시설을 간소하게 새로 인테리어 하는 것에 관해 아나킨의 의견을 물었다.

   “원하신다면 그때 가서 새로 인테리어 하는 것까지 고려해서 견적을 다시 내드릴게요.” 아나킨의 말에 오비완이 요구 사항을 추가한다. “인테리어 시공을 직접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아나킨은 짧은 고민 끝에 답했다. “기초 공사 하고, 타일 깔고 벽지 발라서 새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제 전문이죠. 가구를 바꾸거나 공간 자체를 개조하는 건 다른 전문가를 불러야겠지만.” 오비완은 아나킨의 이전 고객들로부터 추천을 듣고 연락을 취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돈이 되는 고객들은 대개 그런 경로로 그에게 접근해왔다.

 

   “1층의 대욕장은 이 집의 전 주인이 좋아했고, 부엌은 전 전 주인이 좋아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처럼 그 공간을 충실히 쓸 될 일이 없습니다. 그런 취향이 아니거든……인테리어는 차차 고려하기로 하고 일단 배관 교체만 계산했을 때 기간과 비용은 어느 정돕니까?”

   아나킨은 공사 면적으로 비용을 계산하는 과정을 오비완에게 보여주고 결과를 금액으로 불러주었다. 아나킨의 평균 일 년 수입의 족히 세 배는 되는 액수였다. 서너 달, 아무리 길어도 여섯 달을 넘지 않을 단 한 건의 대가가 말이다! 그의 고객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이렇게 수긍하는 말을 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지요. 건설 회사가 준 도면과 자료를 보여줄 테니까 공사 계획을 좀 더 자세하게 세워줘요. 그쪽에서 계약서를 만들어오면 착수금을 주고, 그 후 진행되는 걸 봐서 중도금이랑 잔금을 계산하도록 하지요.”

   “그럼, 아마도 2층부터 작업해야 할 것 같네요. 가장 많이 쓰는 방부터 공사를 끝내는 게 당신이 나중에 편할 것 같아서, 어때요?”

   “그렇게 해요. 2층의 다른 방을 쓰면 되니까……아니면 아예 3층으로 옮기는 게 나을까요?”

   “3층보다는 1층으로 옮겨야 할 거예요. 도면을 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아마도 2층 공사를 하는 동안에는 3층 배관도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오비완이 가지런하게 접혀 정리되어 있는 여러 장의 종이가 든 파일을 가져다주고 1층 부엌의 널찍한 아일랜드 식탁을 내주었다. 도면으로 보니 집은 둘러본 것보다 더 크고 넓었으며, 넉넉한 공간을 활용해 모자람 없이, 그러나 과하지 않게 필요 요소들을 촘촘하게 배치하고 있었고, 배관 또한 규모가 커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클래식하고 단순한 구조였다. 그나마 애로사항이라고 한다면 증축을 한 것 같은 1층의 대욕장과 부엌이었다. 오비완의 말에 따르면 이전 주인들의 취향인. 전 주인과 전 전 주인이라면, 그의 부모와 조부모일까? 그런 것 치고 ‘전 주인’과 ‘전 전 주인’이라는 호칭에서 가족에 대한 친근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집에 사는 양반들 사이에서 그렇게 드문 사연은 아니지만.

   ‘1층은 나중에 생각하자.’

   도면으로 집 전체를 파악하고 청사진을 그리며 아나킨은 앞으로 새로운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도면에 없는 개조라든지 시설물이라든지 대체할 부품이 없다든지), 이번 건은 ‘당첨 복권’이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가 상금을 수령하려면 몇 개월을 수고롭게 일해야 하지만, 그건 당첨되지 않아도 마찬가지니까. 선금과 중도금으로 청구할 2층 공사비용을 계산하고 계산기에 찍힌 숫자를 보며 아나킨은 속으로 환호했다.

 

   ‘횡재했다!’

 

   나직하게 휘파람을 부는 아나킨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오비완이 말을 걸어온다.

   “젊어 보이는데 경력이 꽤 오래됐더군요.”

   “견습 생활을 어릴 때 시작했거든요. 어머니 영향으로 이런 일을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접했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나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혼자 살고 있죠.”

   “미안합니다 아나킨.”

   “아니에요 오비완. 어머니가 일하던 집은, 제 기억에는 이 집보다 훨씬 크고 넓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매일 돌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그때 어린 제 눈에는 모든 게 실제보다 커 보였을 수도 있죠.”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오비완의 표정과 목소리는 여전히 격식을 갖추고 있지만 묘하게 부드럽고 친근해져 있었다.

   “그렇다니 아직은 혼자인가요?”

   아나킨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일했던 집의 아가씨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 간 잊은 적이 없는 얼굴. 아나킨 그보다 다섯 살이 많은 젊은 아미달라를 아무도 모르게 품고 살아온 세월을 들추기라도 하듯이 평이하게 물어오는 오비완의 물음에 아나킨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네, ‘아직은’요.”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오비완이 인터폰으로 다가가더니 저택 정문 앞에 서있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술을 벙긋했다.

   “이런 빌어먹을.”

   아나킨은 잠깐 자기 귀를 의심했으나 바로 이어서 오비완이 차가운 목소리로 빠르게 혼잣말을 해서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오늘이로군! 바로 오늘이야 이 빌어먹을 양아치 놈, 구질구질한 자식.”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거실을 왔다 갔다 하더니 오비완이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고, 저택 정문 잠금을 해제하는 버튼이었는지 몇 분이 더 지나 현관 초인종이 우렁차게 울렸다. 오비완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더니 현관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오비완의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가 날카로운 어조에 다 드러나고 있었다. 잠시 후 합의를 보았는지 조용해졌고, 문이 닫히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두 명의 인기척에 아나킨은 고개를 들었다. 새로 등장한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씩 웃으며 말한다.

   “손님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케노비.”

   드레드록스와 가무잡잡한 피부,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가 강한 인상을 주는 남자는 오비완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오비완은 이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남자가 덧붙인다.

   “새 애인인가?”

   참고로, 아나킨은 배관공의 전형적인 작업복 차림이었다.

   “한 번만 더 헛소리를 하면 문 밖으로 엉덩이를 걷어차 주겠어.”

   오비완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고, 오비완의 ‘전 애인’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오비완이 있는 거실로 갔다. 소파에 앉아있는 두 사람과 아나킨 사이의 거리는 뭐라고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뭐 고장 났어?” 남자의 다정한 물음에 오비완이 대꾸한다. “신경 끄지 그러나.” 남자가 한 가지를 지적한다. “우리 아직 안 헤어졌어.” ‘아, 그런 거야?’ 라고 아나킨은 생각했다. 오비완이 딱 자른다. “안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헤어질 생각이야.” 남자가 어이가 없는 한편 체념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한다. “원고가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했지 그럴 계획이라고는 말 안 했잖아. 영영 연락 안 하면 그걸 내가 이별 통보로 받아들이길 바랐나?” 오비완이 비아냥거린다. “잘 알면서 이렇게 눈치 없게 구나?”

   “아니까 그런 거지 오비. 아마 이유도 말해주지 않겠지. 너는 나에게 돌이킬 기회 한 번 주지 않고 너 혼자 끝내버리니까. 내가 알아차리도록 힌트 한 번 주지 않지. 내가 헷갈리는 건 말이야, 네가 서둘러 새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마음대로 생각해. 이제 끝난 사이니까 친하게 부르지 말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천이 안 되는 건지 그거야. 서로에 대한 우리 마음이 아직 다 식지 않았다는 걸 너도 알겠지. 정말 끝난 사이인가? 내가 이 집을 나가면 너는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도 않고 나를 부르지도 않을 건가? 나와 함께하는 동안에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종종 그랬듯이 말이야.”

   “빌어먹을 자식.”

오비완이 힘 빠진 소리로 날카롭게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락을 했을 때 나를 거절하지 않을 사람에게만 연락을 하니까.”

   “네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말이지. 내가 그동안에 네가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 아무래도 헛수고였던 모양이야.”

   “그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가.”

   “네가 나에게 연락한다면 나는 받을 거야. 그래서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거야. 너를 사랑하고 너를 아끼니까.”

   남자가 가고 오비완은 한참 거실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아나킨을 향해 “아직 할 게 남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나킨은 곧장 대답했다. “내일 와서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약서는 이번 주 안으로 가지고 오죠.” 이런 상황에서는 할 게 있어도 없는 거다.

 

   “잘 가요 아나킨.”

   오비완이 거실 소파에 앉아서 맥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쉬어요, 오비완.”

   아나킨은 친절하게 답례를 하고 제 물건을 챙겨 나왔다. 현관을 나서서 정원 가운데를 지나 저택 정문 밖으로 나오자, 길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그를 맞아준다.

   “1층 부엌이랑 욕실을 손봐달라고 합디까?”

   아나킨은 무시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대꾸했다.

   “오비완이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스카이워커랬나?”

   아나킨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이 노려보자 남자가 저쪽에 주차되어 있는 아나킨의 밴(옆면에 ‘스카이워커 배관 수리, 인테리어 시공 전문,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불러주세요’라고 쓰여 있다)을 히치하이킹 할 때의 손 모양을 하고 엄지로 가리킨다.

   “내가 뭐하는 사람 같습니까?”

   아나킨은 짜증이 나서 떠오르는 대로 대꾸했고, 그의 말에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내서 웃었다.

   “오비완은 당신이 양아치라던데요. 사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그 사람과 비슷한 투로 말하네. 자꾸 그 사람 말을 주워 담지를 않나. 전부터 알던 사이입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아닌데.”

   “당신이 아는 바가 맞아요. 오비완과는 오늘 처음 봤죠. 왜냐하면 나는 배관 수리공이고, 고객이 저에게 일거리를 맡기겠다고 해서 오늘 보러 온 거니까.”

   “나는 일단 형사요. 솔직히 말해서 아까 당신을 이용했어요. 케노비는 정말 단 둘만 있으면 그 정도도 진심을 드러내지 않거든. 제3자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만이 진실로 이해받을 수 있는 듯이 말하기 시작하지. 아무튼 당신을 이용한 건 미안하니까 당신이 앞으로 계속 그를 상대하려면 알아야 할 거 하나 알려주죠.”

   아나킨은 ‘알고 싶지 않은데요’ 라고 뿌리치지 못했다. 남자가 “돈 많이 준답디까?” 라고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요. 줄 수 있는 만큼 다 주지. 그러면서 자기는 이 정도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무섭도록 극단적으로 행동해요. 나도 이 집 정문 앞에서만 몇 번 당했습니다. 아무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고 한 달 동안 연락이 안 돼. 나중에 보니 두바이의 별장에 가있었더라고.”

 

   순간 아나킨은 ‘그의 평균 일 년 수입의 족히 세 배는 되는 액수’가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안 될 일이다. 남자가 계속 말했다. “그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은 사람이 그 인생에 딱 한 명 있어요. 이 집의 전 주인인데 오비완의 후견인이자 스폰서였지. 전 전 주인이 살아있는 동안 그렇게 오비완을 그 집에서 내쫓고 싶어 했는데 전 주인이 감싸줬답니다. 보통 사이가 아니었는데 결국 맺어지지는 못하고 전 주인이 세상을 떠났지요. 그게 답이었지. 케노비는 상대가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하면 자신은 외면해요. 그러니 그에게 절대 마음을 주지 말아요.”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나는 게이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케노비도 그런데 둘이 같네.”

   “내 말은, 나는 스트레이트라고요!”

   “사랑에 대한 그 사람의 지론이 있지. ‘따먹든지 놓치든지 둘 중 하나(it's always a hit or miss)’ 라고.”

   “미친, 만약 그렇다면 무조건 놓치는 거고! 보아하니 당신 양아치 수준이 아니네. 오비완이 왜 그렇게 질색을 했는지 알 만하네요. 당신이 그런 식으로 생판 남한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정작 나한테 예의를 갖추던데, 당신이 그러니 차인 거요, 아니면 차여서 정신이 나간 거요?”

   남자는 담배 연기를 토해내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기 전에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집에 발을 들여놨을까.”

 

   개인 사무실로 돌아가서 계약서 양식과 부품 카탈로그를 챙기고, 정확한 견적을 계산하기 위해 따져보아야 할 사항 목록을 만들며 아나킨은 오비완의 태도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돌이켜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가 지적했던 대로 차여서 제정신이 아닌 남자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색안경을 쓰고 사람을 본다면, 괜히 미안해지는 노릇이니까. 무시하고 지나쳤더라면 ‘따먹든지 놓치든지’ 따위의 개소리까지는 안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오비완은 ‘당첨 복권’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고객이 아닌가.

   “방을 1층으로 옮기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물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 내가 2층이나 3층을 쓰면 안 되는 다른 이유가 있나요?”

다음 날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 아나킨이 잠시라도 ‘혹시 이상하게 행동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던 것이 민망해질 만큼 그를 대하는 오비완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2층은 아무래도 소음이 있을 거라, 3층을 쓰세요. 되도록, 공사하는 쪽 반대편 벽에 붙어있는 방이요.”

   그날 아나킨은 1차 견적을 냈고, 계약 시 수령할 선금을 계산해서 오비완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공사에 들어갈 2층 침실과 거기 딸린 욕실을 정리해줄 것을 요청하고 며칠 후에 계약서를 들고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잡았다.

   “주말 잘 보내요 아나킨.”

   그를 배웅하며 오비완이 인사했다. 아나킨은 친절한 미소로 답했다.

   “당신도요, 오비완.”

 

   곧 통장에 입금될 액수를 상상하며 들뜬 주말을 보내고 아침이 되어, 아나킨은 휘파람을 부르며 정원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 현관 초인종을 눌렀다. 오비완이 문을 열어주었고, 아나킨은 경쾌한 톤으로 “좋은 아침이에요, 오비완.” 하고 인사했다. 오비완은 보일 듯 말 듯 입 끝을 올리며 “좋은 아침 아나킨.” 하고 받았다. 거실로 들어선 아나킨은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손님이 계시네요.”

   그 ‘손님’은 해시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눈부신, 전의 그 남자와 마찬가지로 오비완 연배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손님’이 미소를 지으며 아나킨을 향해 우아한 발음과 톤으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아나킨은 예의를 갖추어 곧바로 답례했다. “안녕하세요, 마담. 아나킨 스카이워커라고 합니다.”

   “알고 있어요 스카이워커. 내가 당신을 오비완에게 소개했으니까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크레이즈 가의 새틴입니다. 슈미와 그의 어린 아들을 아미달라의 집에서 보았던 일도 벌써 십 년도 더 되었네요. 파드메가 안부 전해달라더군요.”

   “파드메가요?”

   아나킨은 저도 모르게 약간 큰 소리를 냈다가 아차, 했다.

   “아니……아미달라 양이.”

   “괜찮아요 아나킨. 둘은 어린 시절 친구였잖아요? 그 이후로 못 본 건가요? 그렇다면 십 년 넘게……”

   새틴은 실수를 정정하는 아나킨을 보고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벌서 그렇게 됐네요.” 라고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답하는 아나킨의 표정을 살피고 묘하게 진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옆에 서서 계약서를 읽다가 오비완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나킨은 여전히 뻣뻣한 표정으로 “그럼요.” 라고 답했다.

   “아미달라 양과 아는 사이였군요.”

   “아는 사이라고 할 수도 없죠. 십 년 넘게 얼굴도 못 봤는데.”

   “저 사람도 짓궂지. 다 알면서 말을 꺼내다니. 한 마디 해야겠네요.”

   오비완의 웃음과 목소리에서는 장난기와 날카로움이 함께 묻어났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미리 준비한 수표에 아나킨이 청구한 금액을 적어 “이걸로 계약 성사인가요?” 하면서 내미는 바람에, 아나킨은 ‘그러지 말아요.’ 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새틴?”

   오비완이 새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그렇게 물었고, 새틴이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는 것이 들렸다.

   “전화 했잖아 오비?”

   “배관 공사하는 게 뭐 볼 게 있다고 보겠다는 거야? 당신이 정말 그런 사적이고 평범한 용건으로 시간을 내서 나를 방문했다고는 믿기 힘든걸.”

   “내가 애초에 과장하는 걸 싫어하고 근거 없이 말하지는 않지만, 내가 추천했으니 한 번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어. 혹시 옆에 사람이 있으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되나요 스카이워커 씨?”

   아나킨은 친절함을 유지하며 답했다.

   “어차피 2층 침실 공사 들어가기 전에 뭘 할 건지 직접 보여주면서 설명해야 해서요.”

   “잘됐네요.”

   아나킨과 오비완과 함께 2층으로 이동하면서 새틴은 “공사한다고 해서 당연히 1층 대욕장이랑 부엌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라고 하고 이어 말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나는 둘 다 좋아하지 않았어요. 부엌은 백작의 취향이었고 대욕장은 콰이곤 진의 취향이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오비 당신도 정이 많이 든 것 같았어. 나한테 불만이 있거나 기분이 나쁜 날이면 꼭 대욕장에 하루 내 틀어박혀 있고, 가끔 백작 흉내를 내듯이 출장 요리사들을 불러서 부엌과 다이닝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죠. 그래놓고 자기는 자기 방에 숨어있었어요.”

   2층 침실로 들어와서, 어울리지 않게 말문이 막힌 얼굴로 얌전히 있는 오비완을 곁눈질하며 새틴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방이 제일 좋았어. 왜냐하면 이 방에서 당신은 항상 짜증이 나있었거든. 내가 본 모습 중에는 가장 솔직하고, 가면을 벗은 진짜 얼굴에 가까운 것 같았지. 목욕탕에서보다 더. 그럴 때면 당신 글에서 받은 인상을 실제로 엿보는 것 같았어.” ‘목욕탕에서의 알몸보다 더 솔직했다’는 노골적인 의미의 말에 오비완이 “오 이런.” 하고 탄식한다. 새틴은 방을 휘 둘러보며 아나킨에게 말을 걸었다. “오비완은 나름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혹시 이 사람이 쓴 소설을 읽어봤나요?” 아나킨은 이 대화 전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하며 “문학에 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오비완이 작가라는 것도 지금 알았네요.” 라고 답했고 새틴은 웃으며 “오 다행이로군요. 읽었다면 이 사람에 대해 편견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라고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나에게 로맨스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할 건 아니잖아?”

   오비완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나를 압박하려는 게 아니면, 그래 내가 그동안 지은 죄가 많긴 하지……” 고해를 하듯이 중얼거리는 오비완의 뺨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쓸어내리며 새틴은 “잘 아는구나 내 사랑.” 이라고 우아하게 받아치고는, 세면대와 욕조 등이 깨끗하게 치워진 욕실을 둘러보고 아나킨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는 혼자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저 사람과는 결혼 직전까지 갔었어요.”

   오비완이 분통 터진다는 얼굴로 말했다. 타일 사이사이를 쪼아서 타일을 떼어낼 준비를 하다가 아나킨은 오비완의 다음 말에 동작을 멈췄다. “그러니까 이루어지지 않을 짝사랑은 하는 게 아니에요.”

   “짝사랑은 아니에요.”

   아나킨은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아니었어요. 아미달라가 열다섯 살이었으니, 열 살이었던 저를 그런 상대로 보기는 했을지 의문이지만. 남이 듣기에는 우습겠죠.”

   그리고 오비완이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면 알 수 있어요. 그건 아주 경이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서로 알게 되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이루어지지 못할 걸 알면 포기해야 해요. 그걸 못하고 미루면 짝사랑이나 다름없게 되지요. 고통뿐이에요.”

   그 말은 마치 아나킨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위로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아나킨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반박을 못하겠네요.”

   “설교나 토론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나킨. 우리는 계약 관계이지 사제 관계 같은 것은 아니잖아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 결혼도 계약 관계에요, 오비완.”

   아나킨은 오비완을 돌아보며 듣기에 따라 위로가 될 수도 있을 말을 건넸고, 이번에 오비완은 좀 더 눈에 띄게 입 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사랑과 결혼은 별개인 거죠. 안 그래요?”

   “그래요. 그래서 우리 계약의 증거인 수표는 잘 챙겼나요?”

   넵(Yep). 아나킨이 장난기를 실어 답했고, 오비완은 눈웃음을 치며 “그럼 수고해요.” 라고 말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오비완의 말이 정답이었다. 수표에 적힌 금액만 생각하면 의욕과 열정이 솟아났다. 이러나저러나 오비완은 대단히 협조적인 고객이었고, 막 시작된 그들의 계약 관계는 실로 견고했다. 한 마디로 느낌이 좋았다. 아나킨이 그날 작업을 끝내고, 작업복을 벗어 공구와 함께 욕실 안에 두고 위에는 검정색 티셔츠에 아래는 청바지 차림으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새틴은 가고 없었고, 오비완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병에는 누구든 이름은 들어봤을 유명한 스카치위스키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한 잔 할래요?” 오비완의 물음이 유혹적이다.

   “참. 운전을 해야 하는군.”

   “내일부터는 지하철로 출근할까 봐요.”

   아나킨의 말에 오비완이 웃으며 스카치위스키 병을 손가락으로 톡톡 친다. “그래요……그러면 내일까지 남겨두지요.”

   “좋은 밤 아나킨.”

   “좋은 밤 보내요, 오비완. 내일 봐요.”

   오비완의 미소가 순간 유혹적으로 보였다. “그래요. 내일.”

 

   돌이켜보면, 당시 아나킨은 우쭐거리고 있었다. 오비완 앞에서. ‘마음을 주지 말라’거나, ‘제3자 앞에서만 솔직해진다’거나 하는 말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했다. 그가 오비완에게 말려들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휘둘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아나킨은 확신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은행이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창구에서 수표를 내밀고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아나킨은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다. 이걸 망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좋은 아침, 오비완.”

   “좋은 아침 아나킨.”

   어제 욕실 벽에서 떼어낸 타일 잔해가 미리 깨끗하게 치워져있어서 아나킨은 타일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끌에 대고 망치질을 하는 규칙적인 소음이 벽을 타고 저택에 울려 퍼졌고, 아나킨이 권한 대로 공사를 하는 쪽 반대편 벽에 붙어있는 3층 방으로 임시로 옮겨간 오비완은 명상이라도 하듯이 눈을 감고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당신 타입이지?” 전날, 아나킨 혼자 2층에 놔두고 둘은 1층 거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아서 다 안다는 얼굴로 넌지시 묻던 새틴의 얼굴이 오비완의 눈앞에 떠올랐다. “전혀 아닌데.” 오비완은 곧바로 부정했다. “나 어린애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그리고 한눈에도 답 없는 스트레이트야.” 오비완의 말에 새틴은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그런 게 당신한테 문제가 되지는 않을 텐데.” 라고 약간 서글픈 듯이 말했다. 오비완은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밖에다 대고 소리라도 지를 기세로 창문을 열어젖힌 그는 책을 다 끄집어낸 빈 책장을 창가로 끌어왔다. 그리고 그대로 밖으로 밀쳐 떨어뜨렸고 땅에 부딪친 책장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앞으로 글을 쓸 때는 헤드폰이라도 써야 할까 봐요. 이 집에 들어오기 전의 젊은 시절처럼 말이에요.”

   “많이 시끄러워요?” 아나킨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오비완은 뻔뻔스럽게 “그렇지는 않은데 머릿속에 자꾸 울려서요. 내 기억에 이 집은 공사 같은 것을 안 한다고 해서 평화로웠던 적이 없지만.” 이라고 답했다.

   매일 작업이 끝나고, 작업복을 벗어두고, 아나킨은 오비완이 권한 대로 1층 대욕장에 딸린 샤워실에서 씻고 나와서, 오비완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술을 마셨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 주인들이 살아있던 때보다는 평화롭지요. 새틴이 내가 쓴 소설을 보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신경증 환자이고 겉으로나 속으로나 아주 시끄럽다고 평한 적이 있어요. 나는 그 평가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든다고요? 별로 칭찬 같지 않은데요.”

   “지금까지도 돈을 왕창 벌어다주고 있는 작품이니 무슨 평을 해도 칭찬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소음은 활기의 징조에요. 정적에는 긴장이 있어야 하고 시끄러운 가운데에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요. 긴장과 활기. 그걸 적절하게 조성해낼 줄 아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거든요.”

   그리고 오비완이 평온한 어조로 하는 말에 아나킨은 하마터면 술을 흘릴 뻔했다. “나는 내가 남자도 좋아하는 걸 알고 아나킨 당신이 나를 불편하게 대할 줄 알았어요.”

   아나킨은 진심을 담아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오비완이 나를 불편하게 대하지 않는데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공평하지 않죠.”

오비완이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잔을 비우는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아나킨은 오비완의 내리깔린 눈에서 긴장을 느꼈다. “조심히 들어가요 아나킨.”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나킨 그를 향해 오비완이 부드럽게 인사했다. “좋은 밤.” 아나킨은 오묘한 기분 속에서 “내일 봐요, 오비완.” 이라고 인사하고 오비완의 집을 나섰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2층 침실에 딸린 욕실의 수도관을 거의 다 교체해갈 무렵에는 오비완도 아나킨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 헤드폰을 끼고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오비완은 눈에 띄게 유해졌고, 그날그날 오비완이 기분이 좋아 보이면 아나킨도 덩달아 유쾌해졌다. 공사 진행 상황을 구경하며 오비완은 숨김없이 감탄하며 만족감을 드러냈고 아나킨은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전 애인들이 떠들어대는 바람에 이미 눈치 챘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연상이 취향이에요.” 오비완이 득이 별로 없는 제 취향에 관해 종종 투덜거리면 아나킨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나를 입증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아요. 불공평하고, 솔직히 기분 더럽다고요.” 아나킨이 그렇게 투덜거리는 말에 오비완이 소리 내서 웃었다. 아나킨은 그 웃는 얼굴과 웃음소리가 좋아서 저도 모르게 활짝 웃음을 지었다.

   한 번은 아나킨이 저택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 위 2층 창가에 기대서 그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던 오비완이 “당신도 흡연이 직업병인가 보네요.” 라고 말을 걸었다. 그 이후로 둘은 나란히 서서 서로 불을 붙여주고 담배를 피웠다.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나킨은 오비완이 말하는 방식에도 익숙해져서 적당히 받아치는 법까지 익혔고, 오비완은 그런 아나킨에게 ‘얕잡아 볼 수 없겠다’는 눈빛과 미소를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 오비완이, “새틴이 나는 내 방에서 항상 짜증이 나있다고 한 거, 분명 애프터도 포함해서 한 말일 거예요. 섹스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는 일이지요. 아침 알람 소리보다 오르가즘 직후에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더 불쾌하니까요.” 라고 하며 “아나킨 당신은 열 살 이후로 한 사람만 마음에 품었다면 혹시 섹스해본 적이 없나요?” 라고 태연자약하게 물었을 때 아나킨은 방금 전에 오비완이 말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생각했다. 아나킨은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태연하려고 했다.

   “이런 질문에는 거짓으로 답해야 하는 건가요?”

   “그러지 말아요. 내가 과장하지 않고 별 별 사람을 많이 만나봤는데 아나킨 당신 같은 순정은 또 처음 봐요. 나는 아미달라 양을 잘 모르지만 이런 애정을 받는다면 보통 사람은 아닌가 봐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알았지만.”

   오비완은 술을 한 모금 더 삼키며 계속 말했다. “내가 실수했네요. 섹스네 뭐네 사실 별 것도 아닌데. 단지 경험이 없다는 걸 남들한테 보이기 부끄러워하는 우스꽝스러운 대중적 인식이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어린 시절엔 스트레이트 남자들 몇의 ‘첫 경험’이 되어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멍청한 이야기지요.”

   오비완이 아나킨의 혼란에 빠진 얼굴을 보고 소리 내어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표정 풀어요 아나킨. 어린 내가 그 남자들이랑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긴 하지요. 그들이 어디 가서 자기 경험 있다고 떵떵거릴 걸 상상하면 우습고 귀엽기도 하고.”

   “그런 상대가 된다니 스스로가 불쌍하지 않아요?”

   눈을 흘기는 아나킨의 흉흉해 보이는 삼백안을 쳐다보고 오비완은 입 끝을 올렸다. 길게 망설이지 않고 대꾸하는 목소리는 사실 약간 서글픈데 유쾌한 체하는 것처럼 들렸다.

   “보면 알겠지만 나는 불쌍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날 아나킨은 자리를 뜨기 전 말이 없는 오비완을 돌아보며 먼저 “내일 봐요.” 라고 인사했다. 오비완은 조용히 “그래요.” 라고만 답례했다.

 

   다음날 아침, 아나킨은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저택 정문 앞에 섰다. 한 달 동안 연락 없이 두바이 별장에 가있었더라는 오비완의 전 남친 말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 정문이 열렸고, 아나킨은 정원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현관 앞까지 갔다. 또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오비완이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에요.”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아나킨의 조심스러운 인사에 오비완이 미소를 짓는다. “좋은 아침.”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고, 아나킨은 안도했다.

   새틴 크레이즈의 입에서 파드메의 이름이 언급됐을 때, 아나킨은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짝사랑을 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깨닫고 말았다. 열 살 때의 첫사랑은 십 년이 넘는 세월 그 이상으로 먼 거리에 있었고 다시는 그 시절처럼 마주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파드메는 새틴 같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세계에 살고 있고,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이렇듯 남의 집 수도관이나 교체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비완의 말대로 오비완은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아나킨은, 오비완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착실하게 유도해온 대로, 오비완과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아나킨은 사랑이라는 문제 앞에서 스스로가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만큼, 비슷한 결핍이 있는 듯이 보이는 오비완에게 연민을 느꼈다.

 

   어느 날 아나킨이 작업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을 때, 오비완은 술잔을 앞에 두고 울고 있었다. 2층 침실에 딸린 욕실에 새로 타일을 까는 작업이 끝을 보이고 있어서, 3층 공사를 먼저 시작할까 아니면 1층을 어떻게 손볼 것인지 먼저 정하고 공사 설계를 다시 할까 고민하면서 내려왔는데 마주친 오비완의 눈가가 붉고 눈물이 맺혀 있으며 뺨에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아나킨은 놀라서 “왜 우는 거예요?” 라고 물었다. 오비완이 황급히 손으로 뺨을 가리면서 물 먹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려고 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가요.”

   오비완이 목을 깨끗하게 하느라 큼큼 소리를 냈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날이거든요. 당신도 주정뱅이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 전 주인이라는 사람인가 보다. 아나킨은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오비완, 나는 오늘 분 술을 얻어 마셔야겠거든요.”

   오비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흐흐 작게 웃음소리를 냈고, 아나킨은 잔을 가져다가 언제나와 같이 오비완 옆에 앉았다. 오비완이 그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나킨이 술을 입에 대기 전 물었다.

   “그래서, 추모주인가요?”

   “아니요. 나는 이제 더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 속에서 살지 않아요. 이 집 곳곳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었는데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지요. 가장 대표적으로는 1층의 대욕장이 그래요. 저걸 없애면 이제 마지막 흔적이 사라지겠지요. 내가 말했지요 아나킨. 포기하지 못하면 짝사랑이 되어버린다고. 남는 것은 고통뿐이라고.”

   “당신 말이 맞아요, 오비완.”

   아나킨은 술을 단번에 쭉 비우고는 오비완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하지만, 나도 내가 언제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 보이네요.”

   오비완도 아나킨을 똑바로 보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그러나 저항할 수 없이 유혹적으로 물었다. “키스도 해본 적 없나요?”

   아나킨은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글쎄요, 어릴 때 했던 것은 뽀뽀라고 해야겠죠.”

 

   오비완은 아나킨의 턱을 끌어당겨 입술을 핥으며 혀를 내밀라고 말했다.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하듯이. 키스는 느긋하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비완의 혀는 솜씨 좋게 아나킨의 혀에 저를 얽고 문지르며 입 안팎을 출입했다. 그러다가 오비완은 아나킨의 입술을 핥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입에 넣고 빨고 핥아먹었다. 아나킨은 오비완에게 배우듯이 그를 따라했다. 주도권을 가져와서 조금 집요하게 오비완의 혀를 짓뭉개며 입술을 한입에 물고 빨았더니 오비완이 흥분한 듯이 그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맞닿은 피부가 뜨거워진다. 아나킨은 묘한 충족감이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며 손을 올려 오비완의 얼굴을 감쌌다. 곧 오비완의 손이 아나킨의 샅을 주무르다가 느슨하게 한 바지춤과 속옷 안으로 들어온다.

   밤이 늦은 시각이 되어서, 아나킨은 1층 구석의 불 꺼진 침실에서 알몸으로 이성을 차렸다. 원래 이런 용도의 방이라서 방을 1층으로 옮기기 싫어한 건가. 아나킨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고 고요해졌다.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오비완은 바닥에 떨쳐 두었던 바지를 주워들었고, 벗어던진 옷이 그의 발밑에서 어두컴컴한 거실까지 헨젤과 그레텔의 빵부스러기처럼 떨어져 있었다. 아나킨은 미치도록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새틴이 말했던 바로 그 ‘짜증난 얼굴’을 하고 있는 오비완도 아마, 분명 같은 기분이리라. 과연 오비완은 손에 든 바지를 입는 대신에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를 입에 물고 한 대를 아나킨의 입술 앞에 내밀었다. 아나킨은 주저하지 않고 필터 끝을 입에 물었고, 오비완이 불을 붙여준다.

   “나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아요……”

   아나킨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에, 오비완이 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비웃듯이 한쪽 입 끝을 올린다. 아나킨은 천천히 오비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를 향해 내리깐 눈을 흘기며 오비완이 냉정하게 한 마디 한다.

   “이런 건 실수라고 하지 않아.”

   …맞다. 아나킨은 자기 자신과, 누군지 모를 대상에게 속으로 끝없이 욕을 했다. ‘따먹든지 놓치든지 둘 중 하나’ 라고 했던가.

그리고 이건 마침내 ‘따먹은’ 거고. ■

© 2019 by AnaobiModernAUproject2019.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