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생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반복재생됩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억 수 @kimdownpour
[오비완]
[우리 주말에 영화 볼까요?]
[지금 많이 바빠요?]
[응, 조금 바쁘네.]
[아나킨, 이번 주말엔 같이 보내기 힘들 것 같구나.]
[무슨 일 생겼어요?]
[오비완?]
[전화 좀 받아줘요.]
연락이 되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화를 해봐도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기 마련이었고 여러 번 보낸 문자의 답장도 오지 않았다. 처음엔 그가 아픈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그의 집 앞에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집에는 아예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아니면 없는 척하는 건지. 혹시나 나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애초에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생각마저 해버린 자신이 오비완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아나킨은 함께 몇 번 인사를 나눴었던 오비완의 동료가 생각나 조심스레 연락하자 그는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 거라며 아나킨을 안심시켰다. 그의 말처럼 오비완이 바쁘다 했으니까. 분명 일 때문이겠지. 괜찮을 거야. 하며 그렇게 며칠을 더 다짐해야만 했었다.
[아나킨,]
정확히 열흘 만에 오비완에게서 온 답장은 왜 연락이 안 되었는지에 대한 변명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아니었다. 아나킨의 이름을 부르는 문자일 뿐이었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을 나섰다.
오비완은 아나킨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갈색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고 폭신하게 쌓여있는 눈을 구두로 조심스레 밟아보는 그였다. 아나킨은 성큼성큼 그의 앞까지 빠른 걸음으로 갔다. 오비완은 가려진 그림자에 살짝 놀란 듯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자신을 놀라게 한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자마자 얇은 윗입술이 말려 올라가며 기분 좋은 미소를 내보였지만 오비완이 본 아나킨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만 같아 입을 꾹 다물며 눈치를 보았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지만 얇은 카디건만 걸치고 나온 아나킨이 걱정돼 꽁꽁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그에게 둘러준 후에야 서로의 낯익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추운데.”
“이러면 먼저 안아줄 줄 알았죠.”
허리를 숙여 두 팔로 오비완을 감싸 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평소 오비완이었다면 밖에서 뭐 하는 거냐며 그를 바로 제지했겠지만 그도 며칠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게 내심 미안했는지 아무 말 없이 자신에게 폭 안겨있는 남자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동안 연락은 왜 안 됐던 거예요? 걱정 많이 했는데… 아나킨의 목소리에선 서운함이 잔뜩 묻어 나왔지만 오비완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금 바빴다며 그의 두 볼을 조심스레 잡아 눈을 맞추었다. 아나킨은 그가 자신에게 다른 이유를 둘러대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속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의 포근한 품이, 다정한 손길이, 사랑스러운 미소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만을 간직하고 싶을 뿐이었다.
오비완과 꽤 긴 시간을 함께 했다. 남들보다 더 대단한 사랑을 한 건 아니지만, 남들만큼 평범하게 때론 짓궂게 사랑을 나눴다. 아나킨은 항상 오비완의 집에서 주말을 보냈다. 집을 합치자는 의견을 냈었지만 너의 그 힘을 주말에도 감당하기 벅찬데 나에게 죽으라는 소리 같구나. 하고 농담조로 되받아치며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다시 말해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평일에도 자주 얼굴을 마주 보긴 하지만 서로 일에 지쳐 같이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가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꾸벅꾸벅 졸던 일도 잦았다. 그런 모습에서 아나킨과 오비완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서운해하기보단 조용히 씩 웃으며 핸드폰으로 서로의 자는 모습을 찍어 저장한 적도 많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주말에 오비완은 아나킨의 핸드폰으로 찍어뒀던 풍경 사진이 갑자기 생각나 자신에게 전송하려 그의 사진첩에 들어갔던 그 날부터 오비완도 장난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나킨의 사진첩에서 보았던 것은 세상모르게 곤히 자는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고 있는 아나킨의 셀카들과 오비완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대어 쪽 소리가 몇 번이나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끄응 거리며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검게 변한 뒤이어 들리는 대화로는 “미안하구나, 오늘 일이 너무 바빠서….” “아, 아니에요. 오히려 고마운걸요.” “응?” “아니에요!” 하며 다급하게 끊기는 영상이었다. 처음엔 그의 사진첩을 보고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혼을 내줄까 싶다가 이내 관두었다. 오비완의 사진첩에도 그런 아나킨의 모습이 하나둘씩 쌓여서 볼 때마다 미소를 감출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 눈엔 우리 둘은 너무나도 달라서 오비완 같이 조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떻게 너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했지만, 아나킨은 그런 말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저가 본 오비완은 그 누구보다 아이처럼 해맑았고 가끔 놀랄 정도로 얄미워 그날 밤마다 호되게 혼 내켜야 했던 사람은 저였으니까.
* * *
주말에 급한 약속이 생겨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을 꺼낸 사람은 오비완이 아닌 아나킨이었다. 그는 평소 오비완과 주말을 보내는 주기적인 약속을 제외한 다른 주말 약속들은 단칼에 잘라내어 평일로 약속을 다시 잡거나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넘겼다. 그런 그에게 급한 약속이 생겨 그의 집에 못 갈 것 같다는 말은 누가 봐도 거짓말이 분명했다. 아나킨도 애초에 그가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요즘 들어 저와 있는 게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오비완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온종일 그의 옆에 붙어서 자신을 더 싫어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주말의 첫날인 토요일 오전을 힘겹게 버티다 붉게 물든 하늘은 서서히 옅어지고 불이 꺼진 집안을 유일하게 비치는 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혹시나 그에게 연락 오진 않을까 어쩌면 내가 못 보고 지나친 메시지나 부재중 전화는 없을까 수시로 확인해봤지만, 아나킨의 핸드폰은 무안할 정도로 조용했다.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라면?’
오비완 주위에 저보다 더 그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생각조차 해봤다. 당장은 진지했지만 금세 픽 소리 내어 웃고 고개를 저었다. 오비완이 지금 이 생각을 알았다면 자기도취는 이만하면 좋겠구나. 하며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려 아나킨을 흘겨봤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을 거다. 당장은 그의 미소가 너무나도 고프니까. 아나킨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애꿎은 핸드폰 화면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곧 그의 간절한 마음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핸드폰에서 울리는 요란한 진동소리에 심호흡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비완…?”
“…….”
대답 없는 물음에 아나킨의 시선은 다시 핸드폰에 닿았다. 분명 그가 맞다. 맞는데.
“오비…”
“내가 아마,”
단 두 단어밖에 말하지 않았지만, 단숨에 알 수 있었다. 통화 너머 들려오는 낯익은 말투와 익숙한 목소리의 남자는 뜸을 들이다 이내 크게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
…보고 싶구나. 아나킨은 급하게 옷을 챙겨 입으며 집 밖으로 나서려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 인상을 찌푸리곤 신음을 내뱉었지만 기쁨을 숨길 순 없었다. 아픔을 내세워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지금껏 고통스러웠던 그의 고민은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종결 되었다. 그럼 그렇지.
아나킨의 집 주변은 항상 어두웠다. 가로등이 촘촘히 있지 않아 빛은 있으나 마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중요치 않았다. 아나킨이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본 것은 비틀비틀 걸어가는 취객도 조용히 지나가는 길고양이도 아니었다. 가로등 밑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친 남자의 깊게 베인 그림자였다. 제가 아는 남자가 분명했다. 그 카디건은 애초에 아나킨의 것이었다. 작년 따듯한 햇살이 은은한 꽃향기와 어우러질 봄이었을 거다. 오비완의 집에 그 카디건을 입고 갔던 그 날, 장난으로 그 옷을 오비완에게 간신히 입혔었더랬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나킨을 노려봤지만, 그는 재미난 것을 찾은 듯한 모험심 가득한 표정으로 시선은 옷에만 향했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해줄 뿐이었다. 결국 오비완이 입었냐고? 물론. 애초에 말릴 새가 없었으니까. 아나킨의 카디건은 오비완에게 무릎이 덮일 만큼 길었고 손가락만 살짝 보일 정도였다. 어른의 옷을 몰래 훔쳐 입은 아이가 따로 없었다. 아나킨은 오비완을 등 떠밀어 거울 앞에 서게 했고 웃음을 꾹 참으려 입을 앙다물어도 새어 나오는 웃음에 오비완마저도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 말고 오비완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데요? 하며 억지로 그에게 선물로 주었던 그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나킨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앞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나 오비완은 아나킨을 보며 얕은 미소를 짓지도, 천천히 와도 된다며 타이르는 다정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풀어 아무 말 없이 아나킨의 품에 안길 뿐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깜짝 놀랐지만 아무렴 좋다고 생각했던 아나킨의 표정도 삽시간 굳어져만 갔다. 무언가 이상했다. 제게 안긴 남자의 어깨가 얕게 들썩이며 쌕쌕거리는 숨소리는 불규칙했다. 품에 안겨있는 그를 살짝 떼어내 바닥을 향해 떨궈진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아쥐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오비완의 눈물은 아나킨의 손에 닿아 그의 손바닥 안을 간지럽혔다.
보고 싶다는 오비완의 전화가 아나킨을 놀라게 만든 건 당연했다. 오비완은 솔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짓말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감정을 쉽게 내뱉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제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단지 보고 싶었다는 것만으론 충분치 못했다. 아나킨은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오비완의 팔은 어느새 아나킨의 허리를 다시 감싸 안으며 응석 부리듯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머뭇거리던 입을 도로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를,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한참을 안았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자 안부였고, 오비완의 일정한 숨소리는 아나킨에겐 그가 건네는 위로 같았다.
“아나킨.”
오비완의 젖은 목소리는 유리처럼 얇고 희미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고 싶었다.
“네, 나 여기 있어요. 바로 당신 앞에.”
그의 이름을 부르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추위로 붉어진 아나킨의 뺨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고 애써 웃으며 미안하다고, 늘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발뒤꿈치를 들어 차가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아나킨은 조금씩 자신과 멀어지는 그의 그림자를 쫓아가지도 못한 채 볼에 남아있는 그의 따스한 온기 위로 슬픔에 일그러진 눈물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내가 당신을, 당신은 나를 싫어할 수 있는 이유라도 있었다면 지금보단 나았을 텐데.
* * *
“오비완.”
“…….”
“오비완, 내 말 듣고 있어요?”
“아, 미안. 뭐라고 말했지?”
우린 그 날을 잊었다. 그날 밤에 있었던 모든 말과 행동을 지워야만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지만, 확실히 그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분명 그가 제 옆에 있고 그의 향, 손길, 웃음 모든 게 다 예전처럼 같다고 생각했는데 창밖을 바라보며 딴생각에 잠겨있거나 어느 순간부터 저와 둘만 있는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마냥 다른 누군가를 부르려 애쓰는 오비완이 보였다. 아나킨은 자신의 모든 감각이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내가 싫어진 거예요?
어두워진 밤하늘은 아나킨의 목소리를 더 낮고 짙게 만들었다. 앞서가던 오비완의 발걸음은 멈칫거리며 한동안 등을 돌리지 못했다.
나를 좋아하긴 했냐고요.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를 몰아세우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말. 지금까지 오비완은 티를 내지 않아도 눈에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 사랑에 빠진 얼굴, 표정, 목소리. 그것이 다 저에게만 향해 있었다는걸. 그가 무슨 말이라도 건네주길 바랐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이라도, 우리가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행동이라도 좋았다. 그러니까 제발.
오비완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은 망설이는 듯하다 이내 고개를 떨구며 아나킨의 손을 부여잡았다. 아나킨은 그의 황금빛 머리칼이 주는 아늑함이 꽤나 좋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은 물론, 날이 선 바람에 차갑게 굳어버렸다가도 금세 다시 축 처지는 것조차. 고개를 떨구고 나의 시선을 피하는 시간이 그와 눈을 맞추며 함께했던 시간보다 많아진 지금에서야.
물이 신발 가죽에 부딪혀 툭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비가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당신의 눈물도 우리의 관계도 아무도 모르게 깨끗이 씻겨 처음 시작하는 그 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옷장에 있던 너의 옷을 입고 짙게 베인 네 향기도 맡아보고, 사진첩에 있는 사진들도 보고, 너를 안아도 봤었지. 그날, 말이야.”
오비완은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가 가다듬지 않고 살짝 갈라져 금방이라도 목 놓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모르겠어, 아나킨. 내가 왜 이러는지 나조차 알 수가 없구나. 나는 정말…….”
간절해 보였다. 나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그의 몸은 덜덜 떨렸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나를 갈망하고 있다.
알고 싶지 않은 정답, 인정하기 싫은 진실. 답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정답을 알려주면 내가 다친다. 너무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만큼. 하지만 답을 알면서도 그를 모른 채 한다면 그가 먼저 죽겠지. 왜 죽어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결국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다.
“그건 아마도,”
아나킨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뱉기 싫은 말은 그 어떤 것보다 무겁고 그것을 세상 밖으로 꺼낼수록 상처는 더 깊게 베였다.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청회색 눈동자엔 금세 눈물로 가득 차올랐고 이내 붉어진 눈가 위로 흘러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과 두 눈은 쉴 새 없이 깜빡이지만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아닐 거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나킨은 그런 오비완을 보며 제 심장을 칼로 짓이겨 놓고 싶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의 감정을 내 입으로 말하게 하는 그가 너무나도 잔인해서 심장을 칼로 찔러 짓이겨 놓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만 같았다.
드디어 당신이 미치도록 밉고 싫은데 당신은 내가 싫어진 것도, 미워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당신은 나를.
아나킨은 마주 잡은 두 손을 다른 한 손으로 천천히 빼내었고 허공에 내려놓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나 오비완으로 가득 찼던 그의 푸른 눈은 이젠 어딘가 텅 비어버린 듯했다.
체념이었다. 상실이었고, 당신조차 애써 외면했던 이 관계의 끝을, 내가 그토록 피했던 그의 진심을 말해야 했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단 한 번의 마지막 기회였으니.
당신은,
이젠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흘리는 눈물은 안도의 눈물인가, 슬픔의 눈물인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