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생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반복재생됩니다.
같은 생각
파 이 @jjumodi_pi
아나킨은 협탁 위의 무드등과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만 의지해 오비완의 손을 치료하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얌전히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도,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사람도 불을 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엉망인 서로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숨소리만 들리는 분위기는 아나킨이 더 싫어했던 것 같은데.
오비완은 말없이 아나킨을 내려다보았다. 뺨이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다. 왼뺨이 부은 것이 너무 잘 보여 오비완은 괜히 침대 옆 협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와중에도 무드등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드등은 저번에 아나킨이 사 온 것인데, 쓸데없는 소비를 좋아하지 않는 오비완도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어 했다. 넘어지고 깨진 물건들 사이에서 혼자 멀쩡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침실의 모든 물건을 부수기 전에 아나킨이 눈 돌아간 저의 손목을 낚아채서 그럴지도 모르지.
오비완은 이제 자신의 손을 보고 있다. 손목은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 밖에도 아까 난리 쳤던 것 때문에 얼룩덜룩 잔멍이 들고 긁힌 상처도 꽤 되었다. 아나킨이 지금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상처는 어떻게 생긴 거더라.
“산책 갈래?”
치료가 끝나고 아나킨이 구급상자를 정리하는 동안 말없이 손목을 쓸고 있을 때였다.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당장 말할까 집안을 다 치우고 할까 고민하고 있던 오비완은 아나킨이 말을 걸어와 반사적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잠깐 멈춘 듯한 자세로 오비완을 보고 있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일어나 구급상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러 갔다.
오비완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까 전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쉬어 소리가 곧바로 나오지 않아서였다. 그는 목을 가다듬는 동안 무슨 말로 거절을 해야 할까 조용히 고민을 했다.
오비완은 “그럴 기분 아니야.”라며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 집안의 침묵을 유지시킬 수도 있었다. “이 추위에 제정신이야?”라고 비꼬아 2차전을 시작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유치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거듭되는 고민 끝에 그는 자신이 그저 그 말에 “싫다.”라고 말하는 것이 싫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수 없지. 딱히 산책을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래.”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닌 것 같은데도 공원은 한산했다. 역시 추위 때문이겠지. 산책을 가자고는 왜 그래서. 아나킨은 뒤늦은 후회를 흘리며 몸을 좀 더 움츠렸다. 곁눈질로 오비완을 살피니 그는 코트 차림으로도 나름 괜찮아 보였다.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상처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반창고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대면서. 아나킨은 롱패딩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고 발을 동동거렸다. 공원 벤치는 앉아있기에 너무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가 산책 가자는 말을 했던 건 순전히 헷갈려서였다. 그 순간 오비완이 밤 산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 밤이면 산책을 가자고 하곤 했다. 함께 조용한 정원을 거닐며 별을 구경하면 그의 기분은 어느새 풀려있었다. 그 공간은 오비완이 제다이 사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제다이 사원. 아나킨은 집을 나서 찬바람을 맞고 나서야 그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비완은 그에게 한 번도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비완과 아나킨이 처음 전생을 기억해냈을 때 그들은 이미 갈 때까지 간 연인 사이였다. 둘은 거의 동시에 전생을 떠올렸는데, 하필이면 100일이 되던 날, 그것도, 그러니까, 하던 때였다. 둘이 환생한 후 처음 우연히 길거리 같은 데서 마주쳐 서로를 알아본 상황이었다면 좀 더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했을지 모른다.
전생이 생각난 후, 그 어색한 밤이 지나고서도 딱히 그들의 관계에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아나킨과 오비완은 대학 친구의 친구 사이로 만나 눈 맞은 커플이었다. 가만 보니 그 친구도 전생에 알던 제다이더라. 뭔 상관이랴. 그들은 바보 같은 규율에 얽매이지도,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나지도 않았다. 실패한 스승과 제자는 그들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들은 괜찮았다.
처음 말을 꺼냈던 건 아나킨이었다. 생일만 겨우 몇 달 빠른 주제에 자꾸만 15살 더 많은 노인네 흉내를 낸다고. 별 의미 없이 말하는 듯해 오비완도 실없이 웃으며 넘어갔다.
오비완은 가끔 고통에 울부짖는 자신의 연인의 얼굴을 한 남자를 내려다보는 꿈을 꾸었다. 그의 몸을 가르던 느낌에 몸서리치며 악몽에서 깨어나면 옆에는 그의 얼굴을 한 아나킨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을 알았다. 있지도 않은 상처가 신경 쓰이기라도 하듯 눈가를 문질러대는 주제에 아나킨은 절대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비완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괜찮은 척해야 했다. 아나킨이 그랬기에.
서로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나름 필사적이었는데도 둘은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
언젠가 또 뭣 때문에 시작된 건지 모를 말싸움을 하던 때였다. 다툼의 목적을 잊고 악을 쓰던 오비완은 맥을 추지 못했다. 아나킨이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들이 싸울 때 좀 더 감정적인 편은 언제나 오비완이었는데.
젖어가는 얼굴을 감싸며 사실은 두렵다고 말하는 아나킨에게 오비완은 무엇이 두려우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그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마주 안아오는 손의 떨림을 느끼며 오비완은 속으로 되뇌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더 잘할 수 있다고. 우리의 결말은 비극이 아닐 거라고.
우리들은 처음부터 발버둥 치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던 걸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나킨은 오비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비완은 앉은키가 자신보다 작아서 꽤 불편했지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싸우지만 않았더라면 그를 껴안았을 텐데.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미웠다. 정확히는 전생의 아나킨 스카이워커, 오비완 케노비의 제자였고, 그를 아프게 했던 그가. 오비완이 상처 입고 자신이 슬프고 화나는 일들 모두 다 그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때까지 멍하니 앉아있던 오비완은 곧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머리로 위로 고개를 비스듬히 댔다. 아나킨이 먼저 기대면 곧잘 그렇게 해왔는데, 이번에는 반창고 위를 문지르느라 손깍지는 껴주지 않을듯하다.
오비완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나킨은 오비완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둘은 어차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눈이 자꾸만 시큰거려 코를 훌쩍였다.
우리는 언제까지 사랑으로 칠해 보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