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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꽃이 피었다
H a z e l @_anaobi_
1.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나킨은 봄이 오는 상상을 했다. 호흡이 밀려 나오듯 터지는 꽃봉오리와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이 녹은 자리 위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상상을. 계절의 순환은 기억과 같아 좀처럼 고이는 일 없이 흘러내렸다. 겨울의 마지막과 함께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바탕 비를 맞은 사람처럼 오비완의 몸은 축축이 젖어 있었고 물비린내가 땀과 뒤엉켜 어디까지가 그의 체취인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이 병이 계절과 함께 지나가고 나면 그는 자신을 잊을까. 아니면… 아나킨은 목소리를 떨어트리는 대신 오비완의 얼굴을 더듬었다. 거세지기 시작한 빗소리가 고막을 두들기고 아나킨……, 끝이 갈라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호흡이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연약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아나킨은 망각이란 낭만에 대해 생각했다. 오비완의 기억 속에서 자신은 몇 번의 죽음을 더 맞이하게 될까.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온몸이 빗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 겹쳐진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고 아나킨은 신음에 뒤엉켜 녹은 자신의 이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입술을 짓눌렀다. 애니, 그만, 아나…. 혀끝으로 서로의 이름이 자꾸만 어른거렸고 삼키고 싶지 않은 순간을 흘려보내며 아나킨은 그의 뺨과 코끝에 입을 맞춘다. 계절을 박제할 수 있다면 흐드러진 당신의 영혼도 뿌리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겨울은 시들어, 금세 죽어버리고 마는 것을. 흘러내리는 비에선 녹슨 흙냄새가 났다. 울타리에서 녹음이 배어 나오듯 끊임없이 번져가는 비 그림자가 계절을 데려가고 있었다.
2.
“그거 먹을 터이냐?”
오비완이 스푼으로 내 접시에 놓인 복숭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고개를 젓기 무섭게 냉큼 집어 들어 입안으로 가져간다. 물렁한 과육이 으스러져 씹히는 소리가 났다.
“더 깎아드릴까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나를 바라보며 오비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뺏어 먹는 게 더 맛있는 법이거든. 가지런한 햇살이 웃음에 머물러 반짝거렸고 놀랍도록 나른한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창가에 걸린 바람이 밀려들고,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말린 살구 냄새가 느른하게 피어오른다. 청명한 바람은 그때의 두근거림을 떠오르게 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오비완 케노비를 처음, 다시 만났을 때.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람 빠진 웃음이 먼저 새어 나왔다. 교수라니. 여기서도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해서, 함께 임무를 나가던 시절의 단편적인 장면과 부드러운 말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삶을 송두리째 덜어내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계를 조작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전생의 업보 때문인지,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돌아야만 했기에. 하이웨이를 달리는 내내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들을 떠올렸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나만큼 외롭고 그리웠냐고, 그리고 날 기억하긴 하나요….
“…아나킨.”
낯익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념을 일깨웠다. 고개를 들자 여름을 부르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비완. 목소리를 잘게 뱉어내며 숨을 삼켰다. 당신을 바라보는 모든 순간은 움직이는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경이롭고 생소해서. 결국은 꺼내지 못했던 무수한 음절이 목구멍에 걸려 따끔거렸다. 따가운 햇빛이 그들 사이를 지나쳤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오비완은 발간 볕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품이 남는 와이셔츠가 여름에 걸려 흔들거리고, 아무렇게나 들어 올린 셔츠 끝 아래로 잘 익은 손목뼈가 도드라진다. 눈꺼풀이 부유하는 찰나 아래로 얄팍한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금방이라도 여름 너머로 사라질 것 같은 당신을 붙잡으면, 내 그림자로 뒤덮여 당신은 금세 밤이 된다.
“나는 당신이 좋아요.”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가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본다. 알고 있단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담백했지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드러나는 반짝거림에 아나킨은 그것이 일종의 장난임을 알았다. 그 빛을 따라 꽃나무가 진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마디마디의 웃음이 희다. 당신은 잔가지처럼 웃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이 마주쳤다. 길지 않은 순간임에도 얽힌 영혼은 호흡이 길다. 콧잔등을 맞대며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끝으로 전달되는 복숭아의 과즙을 느끼며 단단한 하원 껍질을 깨트린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연한 살을 맛보기도 전에 손끝이 나를 밀쳐냈다.
“그런다고 키스를 받아주겠다는 말은 아니란다.”
단호하게 잘라내며 눈썹을 치켜 올린다. 나는 타액이 섞이던 순간을 아쉬운 눈치로 바라보며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같이 사는 연인끼리 뽀뽀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요?”
제다이었을 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도 이제는 애착을 자제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부루퉁한 연인의 얼굴을 보며 오비완이 짓궂게 웃었다.
“기억하겠지만 아나킨, 그런 조건으로 네가 먼저 동거를 제안한 거란다.”
이럴 줄 몰랐다고요……. 투덜거리며 금세 어깨를 늘어뜨리는 것은 꼭 비 맞은 강아지인 양 처량했고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웠기에, 큼큼. 오비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를 바라보며 경우 없이 불쑥 나타난 청년이 자신을 아나킨 스카이워커라고 소개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목소리에 베여있던 약간의 절박함과 진심 어린 간청을, 오비완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비완도 덜컥 승낙해버리면 어떡해요.”
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작게 꼬리를 물고 따라오고 아나킨은 미간을 찌푸리며 오비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담백하기만 한 얼굴이 태평한 소리를 내뱉는다. 그거야 뭐, 네가 좀 잘생겼잖니. 이번에는 오비완이 아나킨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리저리 토라져 나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돌린다. 그건 그렇지만,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발간 볼 아래로 흘러나왔다.
오비완은 가볍게 눈을 감았고 잔잔히 주름진 눈가에 손을 올리면, 무심코 부드러움이 따라올 것 같다. 뺨을 적시는 바람을 따라 오비완이 속삭였다.
“나는 너를 믿었단다, 아나킨.”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먼 곳에서 밀려드는 파도가, 사랑하는 이의 눈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마주하며 웃는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란다.
문득, 새삼스럽게도, 나를 지탱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그리워서, 다정하고도 이상스러운 기분이 든다. 당신은 믿음에는 조건이 없었고 그것은 한때의 나에겐 파도가 해안에 밀려들 듯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 겹치는 순간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자신을 배웅해주던 환상과 달리 희고 말랑한 뺨이 만져졌다. 결국, 우리는 만났다.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시간을 공유한다. 단지 그것뿐인데, 그 존재만으로 나를 들뜨게 해서.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오비완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었기에 입술이 겨우 맞물렸고,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나를 밀쳐내는 대신 내 목덜미에 자신의 팔을 두른다. 체온이 목덜미로 스며들어,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여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셔츠 위로 젖어 든 녹음은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 같았고 성마른 호흡이 얽히며 입술이 겹쳐지는 찰나에 나는 사로잡힌다. 사랑해버리고야 만다.
3.
오비완의 집은 그를 닮아 두 사람이 살기에는 소박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은 전혀 지겹지 않았다. 저녁에는 식사를 하며 라디오를 들었다. 자그마한 시골에는 변변찮은 일 하나 없었지만, 당신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치고, 세상을 덮는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와 뿌리가 여름을 지탱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집은 내가 아직 그의 파다완이였던 시절 토로했던 투정을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해안에 있는 근사한 집을 가지고 싶어요. 오비완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러자 했고, 당신은 해안가의 벽이 희고 지붕이 푸른 집에서 산다. 여름이면 능소화의 덩굴이 흐드러질 듯 만발하는 아름다운 곳. 그의 삶에 혹은 무의식 한구석에 자리한 나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사실은, 무심코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
식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깜박거리는 전구를 오비완이 고치겠다고 나섰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미안해서, 라는 변명은 보통 기각되기 마련이지만 거절하기에 나는 유난히 길었던 무더위로 지쳐있었고 여유분의 시간 동안 가볍게 마실 것을 준비하자는 생각이 스쳤다.
글라스에 얼음을 채우는데 거실 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집 안에 있던 모든 전기가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걱정스레 달려간 곳엔 오비완이 망가진 전구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오비완. 그의 이름을 부르자 어깨를 으쓱이더니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떤다.
“그래도 하나는 성공했잖니.”
그의 손끝을 따라가자 과연, 노란 전구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등불 같기도 달 같기도 한 전구의 빛을 바라보며 내가 키득거렸다. 뭐, 크리스마스 같고 좋네요. 그것은 마치 삶의 지표처럼 밤의 한 가운데 피었기에,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언젠가 품었던 질문에 대해 떠올린다.
오비완이 만약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그를 사랑하게 될까?
구태여 되물을 것도 없이, 아나킨은 이제 그 답을 안다. 과거의 그가 오비완을 사랑한 것은 그가 제다이 마스터이기 때문에도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단 한 가지의 맹목적이고 분명하게 빛나는 사실. 마치 물이 흘러들어 바다에 잠기고, 그 발자취를 따라간 파도가 해변에서 부서지는 것처럼.
오비완이 내 옆으로 와 기대었다. 말없이 손을 건네고,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소박하기만 한 마을에는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어 창틀로 쏟아지는 달빛이 훤하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재즈가 흘러나왔다. 다음 곡입니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미스티…….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고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란다.”
좋아한다, 는 말이 유독 도드라져 입술 끝을 스쳤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오비완을 마주하며 그것이 꼭 로맨틱한 고백 같다는 생각을 한다.
“춤이나 출까요?”
오비완은 순순히 응하며 내 팔 위로 자신의 팔을 겹쳐 올렸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우리는 발걸음을 느리게 움직이며 맥박의 주파수를 맞춰간다. 나의 모든 맥박이 당신 것이 되고 당신의 모든 숨이 나의 것이 되는 순간. When I wander through this wonderland alone, Never knowing my right foot from my left I`m too misty, and too much in love.
약동하는 맥박을 따라 그의 등허리에 손가락을 둥글게 맞대며 순간을 음미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물고 체온을 나눠 가졌다.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좋았다. 삶이 최고로 빛나던 순간들…….
x x
휴일에는 당신을 따라 바다로 갔다. 속이 훤한 바닷물이 모래 위에서 잘게 부서지고 있었고 우리는 해안으로 난 길을 따라 느리게 걸었다.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태양 빛은 강렬해졌고 무더운 바람이 피부를 데웠다. 뜨거운 햇살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커피를 사러 다녀오겠다며 웃는다. 아쉬운 마음으로 손깍지를 풀었다. 품이 너른 나무 그늘에 서자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를 따라 모래바람이 인다. 모래는 하얀 조개껍질이나 유리 조각이 깨진 듯 정교해, 칼날처럼 번쩍이며 눈을 어지럽혔다. 멀리서 그가 걸어오는 모습이 흐릿했고 따갑게 내리쬐는 시야는 언뜻 붉게 보이기까지 하다. 그때와 같은 바람이다, 라고 생각하며 아나킨은 눈을 가렸다. 손차양의 틈새로 세상이 이지러지고 가물어간다. 타투인의 붉은 모래 위로 사랑하던 이를 떠나보내던 장면은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별안간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고,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를 악물었다. 마른 목덜미로 태양이 기어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땀방울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다만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사나운 여름이 한차례 지나가고 난 후에 흐릿하게 이어지는 시야 너머로, 커피를 양손에 쥔 오비완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스쳐 지나간다.
손목이 붙잡힌 채,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누구신가요?”
그것은 삶을 도려내는 다섯 발의 총성과도 같았다. 갑작스럽게, 우리의 세계는 무너졌다.
4.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낯선 이에게도 베푸는 오비완의 호의는 퍽 다정했지만 얇은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서늘했다. 닿을 듯 말 듯 한 손끝을 거두어들이며 오비완이 미적지근 웃었다.
“날이 덥네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답했다. 그렇네요……. 이따금 등에 닿는 시선은 처음 보는 이나 미지의 존재를 가늠하는 듯 낯설기만 해서, 덜컥 겁이 났다. 집에 도착한 나는 당신의 코트를 벗겨주고 신발을 벗겨주려 한다. 오비완은 그것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시내에 있는 무수한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내로라하는 의원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상실증이라기에는 너무 개인적이고 악랄한. 그것이 오비완의 상태에 대해 그들이 내린 평가였다. 엄밀히 말해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기억은 온전히 그에게 존재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음악을 듣고 춤을 췄던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나를 지운 채로.
“당신이 저와 연인 사이셨다고요.”
미안하군요…,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가늘고 선량한 음성이 위로라도 하듯 건네진다. 무너지는 절망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나는 당신의 뺨을 떠올려야만 했다. 괜찮아요. 상념 어딘가에 가라앉은 말을 느리게 내보내며 시선을 마주한다. 다시 시작해봐요 우리, 천천히, 천천히라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었다. 당신이 나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점이 없었다. 제다이 시절의 기억에서, 이번 생의 무게가 조금 더해졌을 뿐.
괜찮아. 아가미가 찢어진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대다 온전해진다. 폐부에 들어찬 숨을 게워내며 읊조린다. 괜찮아, 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x x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꿈은 짧은 광기이고 광기는 긴 꿈이다. 아나킨은 이 질 나쁜 악몽이 갇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길 잃은 당신을 그저 지켜봐야만 한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희미해지는 경계를 곱씹으며 나날이 정지해가는 사진을 바라본다. 기억이 조각나는 순간은 느닷없이 악몽의 한 가운데를 두들겼고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에게 나는 이 모든 이야기의 사유를 들려주어야만 했다. 당신은 나와 연인이었다던가, 그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
오비완이 돌아오고,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그 가늘고 흰 목을 내려다보며 침묵에 잠긴다. 사랑하는 이를 닮은 얼굴은 가엽고 애달파 퍽 달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 숙인 입술은 살을 쥐고 흔들고, 마침내 떨어지며 매끄러운 거짓말을 뱉었다. 우리는 원래 이랬던걸요. 나의 기만에 순응하며, 당신은 침묵보다 더 무거운 얼굴로 웃는다.
그렇게 우리는 이 우습지도 않은 연극에 익숙해져 간다.
작은 균열을 발견한 것은 그가 기억을 열 번째로 잊었을 때였다. 아직 나와의 접촉이 어색해 보이는 그를 설득시켜 무릎 위에 앉히고 깎아 두었던 복숭아를 먹여주려 했다. 어쩐 일인지 그가 입을 꾹 닫은 채로 열어주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복숭아의 향기가, 그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을 텐데도. 나는 그를 안아 들어 소파 위로 눕혔다. 시간을 아무리 갉아먹어도 마모되지 않는 푸른 눈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뭐가 문제에요, 오비완.”
손가락 아래에서 짓눌러진 피부가 금세 붉어지고, 옅게 한숨이 밴 목소리가 체념한 듯 벌어졌다.
“네가 내게 난생처음 보는 것을 먹이려 했지 않느냐.”
다시 맞물리는 입술이 병자인 양 창백하다. 오비완. 목을 긁어내리는 목소리가 타인처럼 낯설었고, 불안한 가정이 가슴을 선뜩하게 조였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
입술이 맞닿아 떨어지기까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육중하다. 몇 번 달싹이다, 차마 뱉어내지 못하는 말을 삼키는 눈동자에서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내 모습이 비쳤다. 무한한 우주를 헤매다 길을 잃어버린 오비완과 아나킨. 어디서부터 이 모든 이야기가 어그러졌을까, 기억을 더듬으며 오비완의 얼굴을 훑는다. 눈과 입가에 난 별자리 같은 점, 밀밭처럼 머리카락, 얄팍한 입술…….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나라는 존재를 뺀 모든 것이.
본능적으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나라는 것을 깨닫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 나왔다.
“아나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들지 않은 나의 이름은, 당신의 입술로부터 발화되어 자라난다. 내 이마를 짚어주는 손길이 서늘하고 다정하여 나는 자꾸만 무너진다. 울지 말렴. 자각하지도 못한 새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더럽혔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나의 눈가를 쓰다듬어 준다. 얼굴을 맞대고 마주 안아 준다.
아, 당신은 왜 이 순간에도 한없이 다정하기만 해서. 가까워진 숨이 맞부딪혔고 따스한 온기가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로 흘러드는 나긋나긋한 위로와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은 부드러웠고 수명을 다하고 나부끼는 이파리처럼 여름이 지나가는데, 나는 당신을 독처럼 갉아먹고 병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과거의 어린 제자가 제 스승에게 그랬듯, 그를 결국 죽음까지 몰아넣은 베이더가 그랬듯.
결국은 사랑 때문에, 나는 당신을 상처 입히고 만다.
5.
언젠가는 사랑을 흉내 낼 수도 없는 순간이 온다. 당신을 채우는 이 빗물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산의 정수리부터 누운 당신의 발끝까지를 발갛게 물들이면서. 단지 그것뿐인데, 나는 그 빛이 당신을 앗아가기라도 할 듯 조바심을 낸다.
부쩍 졸음이 많아진 당신은 오후 내내 아무도 찾지 못할, 죽음과도 같은 잠 속으로 도망쳤고 황혼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겨울의 마지막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나킨, 하고 잠결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연약한데, 내 기대는 그보다 더 연약하고 물러. 나를 부르는 음절 하나에도 긴장하여 숨을 멈추고 등을 끌어안는 손이 행여 나를 기억할까 흐느끼게 되고. 왜 부질없는 것을 바랄 때 인간은 연약해질까. 이 모든 게 돌아갈 수 없는 찰나임을 알면서도 꿈에서 깨어나기를 바랄까.
물살 아래의 적요는 아름다웠고 나는 그곳에 갈 수 없다. 겨울이 오면 으레 그래하듯 겨울새는 봄을 위해 떠나야 할 순간을 안다.
“날 잊지 말아줘요.”
내가 비록 이 모든 비밀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아나킨은 오비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상스럽게도 하얀 낯빛은 무슨 꿈을 꾸는지 고요히 잠겨있다. 잠든 이의 속눈썹과 내려다보며 오래도록 생각한다. 좋아하는 마음도 죄악이 될 수 있나요. 비껴 들어온 달빛이 창백한 뺨을 밝히고, 그 탓에 빛이 아닌 배꽃이 흩날리는 것 같다.
나는 왜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걸까. 이렇게나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말이야.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함께 지새워가고 싶었던 무수한 밤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가 달아, 잠이 들기 직전까지 땋아 내린 밤이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텐트릭스 위로 느지막이 떠올랐던 것을, 전쟁이 끝난 후에 서로를 데웠던 모닥불을, 땀으로 흠뻑 젖어 든 모포를, 삶은 내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던 당신의 가르침을…….
천 아래로 번져 드는 추위를 느끼며 모든 기억을 삼켜낸다. 무심코 그리움을 느낀다. 여전히 우리는 어느 것도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은 결말이 없는 이야기였고, 모든 것이 희미하기만 해서. 닳아버린 손끝으로 활자를 써내러 간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안녕, 좋은 꿈 꾸기를.
x x
<어느 봄날 아침, 두세 송이 꽃잎이 벌어진 매화 가지에 아침 햇살이 비쳤는데, 그 가지에 하이델베르크의 어린 학생이 혼자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고 한다.> 오비완이 책을 덮었다. 잊어버린 것과 잃어야만 했던 것들 사이에서. 열린 창문 너머로 봄을 알리는 이른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비완은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떠올렸고, 마침내 꽃이 피었다. ■